아내의 코끼리 이야기 2016.7.12 [관찰기] 결혼이란

새벽에 눈을 떴다. 이와 아내가 없다. 꿈을 꾸나 싶었다. 주방에 갔다가 2층에 가보니 서재방에서 이불을 펴고 자고 있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말도 없이.. 다시 1층에 와서 침대에 누우니 카톡이 와 있었다. 둥이가 자꾸 움직여서 2층가서 잘게. 잠을 못자겠어..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정신이 돌아왔다.

 

아내가 코끼리 이야기를 했다.

 

코끼리는 모계사회래. 숫컷들은 어느 정도 자라면 무리를 떠나야 한 대. 코끼리들은 암컷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아기를 키운대. 위험이 닥치면 할머니 코끼리가 귀를 넓게 펼치고 적진을 향해 뛰어들고 그때 다른 코끼리들이 도망간대.

 

그럼, 무리를 떠난 숫컷들은 어디로 가는데?

 

글쎄.. 다른 무리로 합치거나 떠돌거나? 몰라

 

아내는 씩씩하다. 강하다. 돈도 잘 벌고 지금 사는 이 집도 아내가 지은 집이고 나는 이 집의 방 세칸을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며 용돈을 받을 뿐이다. 아내가 왜 코끼리 이야기를 했을까? 아내는 내가 떠나길 바라는 걸까?

 

몇일 전 내가 중졸이라는 사실을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놀렸고 나는 괴로워했다.  내가 너무 괴로워하자 아내는 나를 안아줬지만 만약 중졸이라는 사실을 결혼 전에 알았다면 헤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나는 모래같다. 마른 모래같다. 쌓으려고 정착하려고 하지만 쌓아질 수 없다. 탄탄한 힘도 찰기도 없어서 성이 될 수 없고 쌓아보려고 하면 스르르 무너진다. 아내와 하나의 부부가 되고 싶지만 마른 모래처럼 바닥으로 쏟아진다.

 

아내는 바쁘다. 사업이 잘되서 신난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이야기를 내게 잘 들려주지 않는다. 내가 걱정이 되거나 이런 저런 것을 조심하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뀌거나 짜증을 낸다. 요즘엔 아예 얘기를 안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아내 회사의 매출이 얼마인지 듣곤 한다. 아내는 자기 일을 존중해달라고 한다. 너무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고 한다. 직원들이 9명인데 또 뽑아야 하고 매장도 하나 더 낸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크다고 한다. 그 스트레스를 내가 덜어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둥이 양육을 더 많이 돕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처럼 잘 안된다. 이가 엄마를 더 찾는다. 아침에 어린이 집에 데려다 주고 아내가 서울에 가면 둥이를 이틀간 돌보고. 충분히 하는 것 같다. 씻기고 재우고 하는 것을 아내가 한다. 그 정도는 아내가 해야하지 않을까?

 

아내는 너무 바쁘다. 우리는 같이 시간을 잘 못보낸다. 같이 있는 동안에도 일 생각을 하느라 내 말을 잘 안듣는다. 아내가 나의 얘기를 더 잘 들어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나에게 마음을 열고 일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아내가 일도 중요하지만 가정, 남편인 나도 중요하게 여겨주길 바란다. 나를 귀찮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실연을 곱씹다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우울할 때면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 있다. 낯선 곳의 공기는 당신에게 싱그러운 자극을 줄 것 이고 낯선 경험은 당신의 허물을 벗겨 성장하게 하리라. 여자들이 우울할 때 여행보다 나은 것은 차라리 쇼핑이다. 차라리 그곳에 우울함을 지워줄 몰입의 지경이 있다. 


나는 우울함이 극에 달한 실연의 상처를 가졌을 때 영국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멋진 스펙을 가진 남자가 내가 가장 초라한 모습일 때 다가와서 나를 미워하며 그에게 더욱 집착했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당했다면 그와 나는 더 길게 만나고 더 성숙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래도 종국에는 헤어졌겠지. 


나는 내 모습을 미워하며 그의 관심에 나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태도와 가식으로 대했고 그를 떠나게 만들었다.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을 겪으며 내 우울함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여행. 하지만 그것은 최악이었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중에도 매 순간, 영국에 도착하여 눈뜨고 잠 드는 매 순간, 미술관의 그림을 보는 매 순간, 트라팔라가 광장에서 눈부신 한낮의 햇살아래 젊은이들이 지저귀는 순간에도, 영국 노인이 내게 말을 거는 그 순간에도 나는 그를 생각했다. 떨쳐낼 수 없는 그의 모습, 그의 음성, 그의 눈썹, 그의 눈빛, 그의 어루만짐. 


7박8일여의 여행동안 나는 그의 생각을 서울에 있는 동안 곱절은 더 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치유가 아닌 고문이었다. 일할 거리도,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나의 모든 시간을 오직 그에 대한 생각으로만 채운. 


서울에 돌아와서 어땠던가? 몇번 더 그를 만났고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내가 참 너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토록 누군가를 좋아해보고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한 내가 참 예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눈빛은 우쭐함과 사랑받는 기쁨에 빛이 났다. 우리의 마지막은 아주 안좋은 전화통화였다. "네가 내게 그렇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라는 가시 돋힌 말을 그가 수화기 너머로 했고 나는 잠시 침묵하다 이제 그만 연락하자라고 했다.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책을 읽다가 나는 어느 문구에서 어떤 날의 냄새와 햇살 같은게 떠오를 때가 있다. 오늘 장석주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우울할 땐 여행을 떠나라는 문구를 보고 서늘하지만 햇살이 눈부셨던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분수대와 내게 말을 걸던 영국노인의 얼굴이 생각나 그날의 기억을 끄적여 본다. 


실연의 우울함을 달래고자 여행을 떠날 생각이라면 모진 마음을 먹고 떠나야 한다. 돈을 내고 떠나는 고문 여행이 될 것이니. 담배를 끊고 싶은 사람이 담배 지옥에 빠져 목이 매캐할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 그 지옥에서 도망쳐 나와 비로소 금연에 성공하는 것 처럼. 




미드 '영거' 내가 다시 26살이 된다면? [관찰기] 결혼이란

미드 'Younger'를 재밌게 보고 있다. 'Sex and the City' 감독 대런 스타가 감독했고 유치한 이야기인데 인기가 있어 시즌4까지 나왔다고 한다. 주인공은 74년 생 이혼녀이자 대학생 딸을 둔 라이자 밀러.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경단녀가 된 후 생계 때문에 다시 취직하려니 40대를 써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룸메이트의 제안으로 평소 나이보다 10살은 어리게 보이는 타고난 동안인지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드레스스타일을 바꾸고 민증을 위조해 출판사 마케팅 어시스턴트로 취직에 성공. 26살로 나이를 속이고 40대의 지성으로 일하며 20대들과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맨하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유치한 이야기가 배우들의 톡톡 튀는 감칠맛 나는 연기, 짜임새 있는 각본, 회당 20분이라는 스피디한 스토리 진행과 대런 스타의 세련된 연출력으로 버무려져 아주 아주 재미지다. 유료로 모바일 영상 서비스 가입하여 이어폰 끼고 하루에 5편씩 보고 있다.

'영거'를 보면서 나의 나이에 대입해서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고 묘한 여운을 준다. 좋아. 내가 필러를 좀 맞고(타고난 동안은 아닌지라)머리를 길고 필라테스로 몸의 탄력을 만들고 20대 스러운 옷을 입고 스물여섯으로 보인다고 하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고 싶나? 아무것도 없다. 스물여섯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소주방에서 싸구려 안주와 술로 밤을 새고. 시덥잖은 농담에 웃고 인기가수 콘서트에 다니고. 가난한 이십대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십대 때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인간관계에서 실수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럼, 서른다섯으로 위장했다고 치자. 무엇이 하고 싶나? 미혼이라고 사기치고 연애하는 것? 잘생긴 남자랑 섹스하는 것? 오우 노~~~ 결혼하고 제일 좋은 것은 감정 소모가 많은 연애를 안하는 것이다. 40대 여성에게 섹스란 호르몬이 돌면 옆에 있는 남편과 불끄고 치르는 불편한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그 주기도 길어져 한달에 한번, 두달에 한번 돌아오는 걸.  

그저 나는 젊어 보이고 싶다. 지금 이룬 것들 모두 다 좋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의 이 심리적 안정과 자산과 가정의 평화를 움켜쥐고 거울을 봤을 때 우울하지 않을 탄력있는 피부, 늘어지지 않은 뱃살이다. 답은 운동과 필러. 그리고 좀더 스타일리쉬한 옷 쇼핑이겠지. 

옷장 정리하고 필라테스 학원을 알아봐야 겠다. 



결혼 4년 반. [관찰기] 결혼이란

다시 혼자 살게 되면 어떨까? 

여섯살이 된 아들을 키우고 일을 하면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하루 중에 여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혼자, 혼자 있고 싶다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몇년 전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나오는 영화를 봤다. 시간이 화폐이고 교환 가치인 미래 이야기였다. 의료 기술로 모든 사람들은 20대의 얼굴에서 노화를 멈추고 부자는 수억시간을 갖고 영생을 하고 가난한 사람은 시간을 다 팔아서 젊어서 요절하거나 심지어 객사를 한다. 지금 나는 돈보다 더 갖고 싶은 게 시간이다. 


혼자만의 시간. 아이를 누가 봐주고 아픈 엄마의 밥을 누가 챙겨주고 나는 회사일 구상만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 남편이 한 일을 맘에도 없는데 칭찬해주거나 남편이란 존재 자체를 신경쓰지 않고 나의 취미, 나의 인간관계, 나의 커리어에만 신경쓰고 싶다. 그렇게 3년 정도 생활하면 다시 그들이 그리울까? 남편과 아이가?


내가 선택한 길이다. 혼자 지긋지긋하게 외로울 때까지 살다가 결혼하여 남편을 얻고 아이를 낳는 삶을. 그런데 4년 반이 지난 지금 그 삶이 다시 그리운 것이다. 짠 것을 먹고 단 것이 당겼다가 또 짠 것이 먹고 싶은 변덕스럽고 예민한 혀처럼. 

내 성격이 젊은 시절과 참 다르다고 느낀다. 나는 외향적이고 늘 사람들 앞에 나서고 일을 벌리기를 좋아했는데. 지금의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싶고 새로운 관계를 넓히기를 싫어한다. 코드가 안맞는 사람과 대화 나누는 것을 못 견뎌한다. 지금 사업 때문에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 그들과 만나는 것조차 최저빈도의 대면을 하고 있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나는 고독을 사랑한다. 고독하고 고독한 후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그 만남은 얼마나 진실하고 값진 것인가~ 

아들이 스무살이 되면 나는 혼자 있게 되리라. 내가 떠나고 싶은 것은 남편인가. 아들인가. 아니면 그저 잠깐 갈증이 나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인가.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6. 불안함이 더 크지만... [소설] 가짜 연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잡혔다. 다리가 제일 자신 있으니까 좀 쌀쌀한 4월 꽃샘추위지만 치마를 입었다. 무릎에서 딱 떨어져서 키가 작아보이지 않는 타이트한 가죽 치마. 그리고 내 얼굴톤에 잘 맞는 노란셔츠에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옷인 베이지색 버버리 트렌치 코트를 입었다. 7시에 H와 신촌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술을 한잔 하겠지. 이리 저리 셀카를 찍어봤다. 화장도 잘 받았고 머리를 풀어도 보고 묶어도 보고. 그냥 푸는 게 낫겠다. 가슴이 뛴다. 콩닥콩닥. H와 너댓번 술은 마셨지만 이렇게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요즘 H는 밤마다 전화를 한다. 밤 10시 쯤. 그리고 30분에서 1시간 이러저런 얘기를 한다. 흡사 이것은 남녀가 둘이 사귈때 하는 연애토크.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TV의 유명인사들, 오늘 일어난 사회 이슈들에 대한 의견 교환도 하고. 농담도 하고. 뭘 좋아하는지 말하고. 웃고. 재미없는 말에도 까르르 웃고, 재미가 있으면 더 호탕하게 웃고. 

강남술집 사건 이후 정아도 내게 연락이 없고 나도 정아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정아는 그날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다행이면서도 내심 기다려졌다. 뭔가 정아에게 내가 어떤 부분이 서운했는지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짚고 넘어가고 싶었는데 정아는 오지 않았다. 오늘 H와 만나는 것을 정아에게 말할 의무는 없지만 찜찜하다. 단순히 정리하자면 정아는 내가 H와 사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H에게 끌린다. H도 나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밤에 1시간씩 통화를 하고 오늘 영화를 보자고 했겠지) 나와 H는 친구가 아닌 남녀 관계이다. 정아는 이혼녀인 내가 집안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촌오빠와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이렇게 정리가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정아에게 H와 만나는 것을 알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더라도 일부러 알리지는 않겠다. - 나는 먼 훗날 이 가정에서 한 가지의 전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니 결코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았다면 나는 그 사랑을 멈췄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답은 글쎄이다. 

옆 자리에 H가 앉아 있다. 향수 냄새가 난다. 진한 쌍꺼풀에 어울리게 진한 약간 아저씨같은 향수. H는 자기의 나이를 5살은 더 들어보이게 하는 스타일링을 아주 잘한다. 오늘도 캐주얼하지 않는 정장 차림의 양복. 내가 트렌치코트를 입어서 H와 서있는 복장이 어색하지는 않다. 영화는 헐리웃 액션영화. 300명의 근육질 남자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맨몸으로 싸우는 영화. 그리고 영화 중반에 전장에 나가기 전날 왕이 아름다운 아내와 나누는 베드신이 있다. 음악과 함께 신음소리 조차 음악처럼 에로틱하며 몽환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정사신이었다. H와 그 장면을 보는 것 만으로도 부끄러웠다. 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건 우리의 첫번째 공식 데이트라구. 첫날부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좀 쌀쌀했지만 걷기로 했다. 다행히 나의 구두는 걷기에 딱 좋은 7센티. 더 높은 힐이었다면 마다했을 것이다. 7센티 힐은 걷기에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준다. 오히려 높은 9센티 스틸레토힐보다 종아리가 가장 예뻐보여서 내가 애용하는 굽높이다. 

- 춥지 않아? 
- 응. 괜찮아. 걸으면 좀 더워질거니까. 
- 여기서 너네 집까지 걸어갈까?
- 한 20분, 25분 걸리겠지? 
- 그쯤? 그리고 전에 우리 갔던 이자카야, 거기 가자. 

충정로 오피스텔 건너편 작은 골목에 있는 이자카야는 나와 H, 정아와 정아의 승무원 후배 성민까지 넷이서 서너번 모였던 장소이다. 여자 셋과 H, 이렇게 넷이 만난 마지막 모임에서 우리는 늘 그렇듯 충정로 이자카야에서 1차를 마셨고 정아와 H가 우겨서 내 오피스텔에서 편의점 와인을 사와 2차를 했었다. 갑자기 H가 우리집에 오는 바람에 나는 먼저 들어가 빨래 건조대의 속옷을 치우고 사람들을 들였고 정아는 그것이 대단히 주책맞은 일처럼 깔깔거리며 H에게 일러댔다. 

- 하하, 오빠, 유정이 왜 방금 서둘러 들어온줄 알아?
- ?
- 얘, 속옷 걷으러 간거였어. ㅋㅋㅋ
- 정아야, 우리 집엔 건조기가 없으니 당연한 거잖어. 여자들도 아니고 남자 사람이 오는데 당연히 치워야지. 신경쓰이잖어. 뭐가 그렇게 웃기냐? 참, 기집애

넷이 아주 끈끈하지도 않으면서 일주일 간격으로 네번이나 모여 술을 마신 것도 지금 생각하니 참 대단하다. 나는 정아의 가시 돋힌 말이 한번씩 튀어나올 때 마다 조금씩 기분이 상했고, H는 나를 만나기 위해 정아에게 술자리를 만들어 자신을 부르도록 했고 정아는 승무원 후배 성민을 나에 대한 견제처럼 그 자리에 꼭 부르곤 했다. 한눈에 봐도 성민은 H를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성민은 165센티의 작지 않은 키에 양 볼에 아주 매력적인 보조개를 가졌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웃을 때 지어지는 반달모양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정말 예쁜 여자였다. 하지만 성민에겐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불편함들이 보였다. 이 또한 정아로부터 들은 사전 정보였다. 성민은 예쁜 외모와 사교적인 자신의 활달함을 무기로 지금 바쁘게 쇼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신랑감 쇼핑. 국제변호사, 치과의사 등 매주 바쁘게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H와도 원래 정아가 단둘이 만나 소개팅을 시켜줬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성민은 H로부터 애프터가 없어 의아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애프터를 안한 소개팅 남이라서 H에 대한 도전욕 같은 게 생긴 걸까? 성민은 정아에게 H와 볼때 자기를 꼭 불러달라고 했다고. 그리고 이태원에서 정아는 성민을 불렀고 H는 성민을 술자리 친구로 보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성민은 술자리에서 H에게 동네 교회 여동생처럼 살갑고 다정했으며 나에게도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성민은 잘 웃었고 본인도 재밌는 화제를 꺼내면서 대화에 잘 참여했었다. 

늘 모이던 술집에 둘이 들어가니 기분이 좀 묘하다. 

- 정아는 이번주엔 서울 안와?
- 움... 사실 지난 주 이후로 정아한테 연락이 없어. 그날 우리집에서 자기로 했는데 오지도 않았고.
- 아, 너 그날 강남 갔다 온날? 
- 음. 
- 그때 강남에서 누구 만났는데?
- 정아 아는 오빠들? 의사라고 했는데 난 30분 있다 나와서 통성명도 안했어.
- 정아 걔는 아는 오빠들이 왜 이렇게 많어. 참 사람 많이 알어. 정아는 나한테도 맨날 사람 소개시켜준다고 나오래. 
- ㅎㅎ 정아가 사교계의 여왕이잖어. 광주에서는 이미 여왕이고 서울까지 진출하려고 준비중인 듯? ㅎㅎ
- 손 줘봐
- 응?
- 손 가락이 참 길어. 
- 난 마디가 굵어서 예쁜 손은 아니야. 
- 누가 그래? 네 손 예뻐. 난 너 손이 제일 예쁜 것 같아. 아기 손 같지 않고 손가락이 길어서 좋아.

H는 내 손을 만지작 거린다. 나는 편안하게 나의 손을 H에게 맡긴다.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쓰다 듣고 나는 고개 숙여 내 손을 바라보는 H의 손눈썹을 바라본다. 네 속눈썹도 참 멋져. 길고 검은 네 속눈썹. 

H가 내 인생에 들어오고 있는 순간이다. 저벅저벅. 나는 무방비 상태로 문의 빗장을 열고 H를 들어오게 허락한다. 그가 나의 심장을 아프게 할 것인가. 나의 심장을 따뜻하게 할 것인가. 불안함이 더 큰 상태로 나는 H를 맞이하고 있다. 
  

5. 하자품 [소설] 가짜 연애

H는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부분도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그의 삶이 궁금하고 그가 궁금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중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 군대를 갔다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다가 최근에 아버지 회사와 관련된 자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지방 도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내 주위에 중학교때 유학을 간 사람은 없다. 대학교 때 흔히 가는 어학 연수나 교환학생을 다닌 사람은 있어도. 내가 아는 지인 중에 병원을 가지고 있고 골프리조트, 학교, 호텔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둔 사람은 없다. 정아의 외삼촌이 그런 부자이고 H는 그 부잣집 아들이다. 처음에 H가 그런 부자인줄은 몰랐다. 정아가 그런 외삼촌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H와 첫 만남 후 정아가 1주일에 한번 씩 서울에 와서 정아, 나, H, 때론 정아의 승무원 후배까지 넷이서 술을 마신 게 서너번. 그럴 때 마다 정아가 내 오피스텔에 묵으면서 H에 대해 하나씩 알려준 정보들이다. 사실 신화의 에릭처럼 생긴 깊은 쌍꺼풀과 진한 눈썹의 남자를 만나본 적도 처음이다. 첫 만남에서 그 깊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H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나는 그 눈이 부담스럽고 느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피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그것은 떨림이었다. 애써 거리를 두기 위해 느끼한 눈이다라고 자기 세뇌를 했던 것이다. 

나는 H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떨리는 마음이 들킬까봐. 정아는 내가 H와 자주 연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아 생각엔 집안에서 가장 권력있는 외삼촌의 외동아들이 이혼녀와 사귀고 그 모임의 주선을 조카가 했다는 것이 난처할 것이다. 그리고 정아는 내가 H의 '깜'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H가 원하니까 같이 술자리를 하자고 꼬드기면서도 내가 H에 대해 먼저 물어보거나 안부를 물으면 걔 엄청 바쁘니까 연락하지말라고 가시 돋힌 말을 한다. 정아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일까. 정아가 불편해진다. 분위가 좋다가 가시 돋힌 말을 한번씩 해서 무안했던 적이 있다. 그것땜에 너랑 안놀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아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정아와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 정아는 친구가 아니다. 더 크게 마음 상하기 전에 정아와의 만남의 횟수를 서서히 줄여야겠다. H와 만나는 자리에도 나가지 않겠다. 나가고 싶지만 안 나갈거다. 오늘 이 약속에도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또 정아가 어떤 말로 내게 상처를 줄까 불안하다.  

정아가 부른 강남의 술집은 내가 평소가는 홍대의 이자카야 같은 곳이 아니었다. 4미터는 되어보이는 고급스러운 웅장한 나무현관문에 간판도 보일 듯 말듯한 작은 명패 사이즈이다. 거대한 나무 문을 여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지하에서 다시 유리 현관문을 여니 좁은 복도 양옆으로 모두 룸인 술집이었다. 정아는 강남에서 의사 오빠들과 만난다고 나를 불렀다. 알아두면 좋은 사람이니까 나오라고 했다. 글쎄라고 하자 "별로 할일도 없잖아. 나와. 좋은 오빠들이야. 그리고 나 그날 너네 집에서 재워줘야 해"라는  말로 어영부영하다가 약속에 OK를 해버렸다.  

- 너, 어디야? 나 지금 지하인데, 너 못 찾겠어.
- 3번 방으로 들어와.

방에 들어가니 천장이 높고 조명이 어둑한 룸에 ㄱ자 형태로 침대만큼 편안해보이는 넓고 폭신한 소파가 놓여있다. 그 소파에는 두 명의 남자가 푹 잠겨 있듯 앉아 있었다. 테이블엔 양주와 아이스버킷이 있고 정아는 미니스커트 차림새가 흐트러지지 않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소파끝에 걸터 앉아 있었다. 두 명의 남자는 초면인 내가 들어서도 자세도 고쳐 앉지 않고 나른한 눈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 오빠, 내 친구야. 중학교 동창. 홍대에서 인터넷 쇼핑몰 해. 속옷 쇼핑몰
- 오~ 속옷 쇼핑몰이요? ㅎㅎ 남자 것도 파시나요? 

남자들은 속옷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이며 인사도 통성명도 없이 대뜸 농담을 건넨다. 예감이 현실이 됐다. 아, 괜히 왔다. 씨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불쾌하고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데에 나를 부른 정아에게도 화가 난다.  

- 아뇨. 여자 속옷만 팔아요. 
- 어, 감기 드신 것 같네. 콧소리가 많아요.
- 예. 감기 기운이 좀 있어요.
- 생강차를 마셔봐요. 좋아요. 

두 남자 중 한명이 생강차 이야기를 꺼낸다. 이렇게 여기서 나는 얼마를 더 있어야 할까? 

- 오빠, 유정이, 어때? 얘가 얼굴은 별론데 남자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어. 내 사촌도 눈이 높은데 유정이한테 관심 있어가지고 맨날 나 서울 언제 오냐고 한다니까. 유정아, 네 매력은 뭘까? 도대체? 

정아가 취한 걸까? 얘는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걸까? 이건 칭찬이 아닌 빈정거림이다.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가 들어온다. 

- 안녕하세요~ 좋은 시간 보내고 계세요? 

낯익은 얼굴의 여자. 알고보니 탤런트이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토크쇼나 예능프로에 패널로 간간히 나오는 여자. 

- 어, 탤런트 같은데? 누구더라? 많이 봤는데? 

남자 둘은 탤런트에게로 온통 관심이 쏠리고 탤런트는 그 남자들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방에 노래방 기계는 없는 걸로 봐서 퇴폐 술집은 아닌 것 같고. 이런 곳이 처음인 나는 어리둥절하다. 탤런트가 갑자기 왜 들어오는지. 

- 유정아, 저 여자. 여기 얼굴 마담같은 거야. 사장 아니고. 손님들한테 인사하고 월급받는. 사인회 하는 것처럼. 얼굴 파는 거지.  

정아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얘기한다. 

- 정아야, 잠깐 나와볼래?

두 남자가 탤런트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굳은 표정으로 가방을 집어들고 복도로 나왔다. 

- 왜? 벌써 가려고?
- 정아야, 너 왜 저렇게 예의없는 남자들을 내게 소개시켰어? 나 아주 불쾌해.
- 왜? 오빠들이 뭐 기분 나쁜 말 했어?
- 사람이 들어왔는데 인사도 없고 소파에 푹 파묻혀 있고. 초면인데 인사도 없고 눈은 다 풀려 가지고. 뭐니?
- 아, 미안. 내가 인사 시켰어야 하는데. 
- 그리고, 너
- 응?
- 아냐. 됐어. 나 먼저 갈게. 앞으로 이런 자리, 절대 부르지마.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이따 보자. 
- 유정아... 기분 풀어. 벌써 가면 어떡해... 

밖으로 나오자 바깥은 깜깜한 밤이었다. 날씨는 흐렸고 서쪽에서 택시를 타고 건너온 강남이 더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비가 올것 같다. 정아는 내가 H를 만나는 것이 몹시 싫은 것 같다. 만나지 마라고 할 수 없는 처지니까 이런 식으로 돌려서 면박을 주는 것 같다. 비겁하다. 나에게 직접 말하면 될 걸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정아는 친구가 아니다. 친구라면 이럴 수 없다. 내가 싫으면서 왜 H와의 자리에 나를 부르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걸까? 다른 친구들은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어서 정아와 놀아주지 않으니까. 내가 혼자여서 가장 간편하니까. 정아의 허전함을 채워 줄 의자 한개. 나는 그런 존재이다. 이젠 의자가 되지 말아야겠다. 정아를 이따 다시 집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술이나 진탕 마시고 와서 곯아떨어져버리면 좋겠다. 

이순간 H가 보고 싶다. 그가 이곳에 있다면 이 곳이 이렇게 차갑고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텐데. 이 순간 보고 싶은 사람이 그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다. 좋아하면 안되는데. 전화하고 싶다. 하면 안되는데. 

지하철 역으로 들어섰다. 저녁 9시라서 지하철은 빽빽하지는 않다. 괜히 왔다. 괜히 정아와 가까이 지냈다. 하지만 정아가 없었다면 H를 알지 못했을 테지. 아니, H를 알게 된 것도 짜증스럽다. 아니, 내가 이혼녀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도 화가 난다. 같은 이혼남이 아니라면 선뜻 다가설 수 없게 나에겐 마이너스 딱지가 붙어 있다. 당신은 하자품. 하자품은 정상품에 다가가지 마시오. 내가 한 선택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이뤄졌던 순간, 나는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었나. 내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자품이라고 여긴다면 여기게 두자. 하자품으로서 하자품 지역을 완벽 접수해주지. 씩씩하게 다짐해도 곧 쓸쓸함으로 채워진다. 초라해진다. 괜히 씩씩한 척 하지말고 집에 가서 씻고 와인 한잔하자. 담배가 생각난다. 

  


4. 툭. 그렇게 쉽게 관계의 끈이 잘렸다. [소설] 가짜 연애

고현정이 컴백을 했다. 전성기 때 보다 더 세련되어진 얼굴. 트레이드마크인 찰랑이는 검은 생머리, 리본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새 작품 '봄날'의 제작 인터뷰를 했다. 플래쉬들이 정신 없이 튄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톱스타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재벌 2세와 결혼. 은둔의 생활과 간간히 사회면에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다는 뉴스. 시댁에서 무시당한다는 가십들. 그리고 아이 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하고 컴백을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스토리이다.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두 어린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비정한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저리 나는 결혼생활을 끝내려는, 그것도 시댁이 그 진저리 나는 결혼생활의 6할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나는 고현정이 동굴처럼 차가운 결혼생활에서 아이를 두고라도 벗어나 숨을 쉬려하는 마음에 이해가 간다. 멋진 여배우가 돌아와서 기쁘고 아이를 두고 홀로 돌아온 것이 안스럽고 행복하고 설레이는 표정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그녀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합의이혼 서류를 가져다가 진호에게 사인을 받고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고 그리고 두 달의 숙려 기간이 지났다. 부부 상담을 받으면 숙려 기간이 훨씬 짧아졌지만 나는 두 달의 숙려 기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환은 그 사이 내 마음이 바뀌길 바라며 술을 먹고 찾아오기도 하고 전화와 문자로 잘해보자고 자주 연락을 했다. 재환은 아이를 갖기 싫어했다. 나도 결혼 전에는 아이를 갖기 싫어하는 재환에게 동의했다. 나는 어렸고 그게 쿨해 보였고 우리 둘이 신나게 잘 살줄 알았다. 3년이 지나자 권태로웠고 나는 강아지 두마리 보다 아이를 원했다. 재환은 피임을 하거나 아예 관계를 기피했다. 그래도 밉지 않았던 재환. 열심히 살았고 내게 다정했고 엄마에게 착한 사위였다. 우리는 친구처럼 같은 집에 동거하며 같이 외식을 하고 서로의 생활에 터치하지 않으며 각방을 쓰며 우리 방식대로 자유롭게 잘 지냈다. 시댁이 재환보다 더 문제였다. 경기도에 위치한 시댁에 매주 주말 방문하길 원했고 매일 며느리인 내가 시어머니에게 전화하길 바랐고 이상한 말들로 나를 떠보기도 했다. 너희 아버지, 너네 어머니랑 따로 사시냐? 같은 말들. 상견례 때 얼굴만 비치고 결혼식에 손만 잡고 들어왔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닌 내연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리고 나와 동갑인 아들까지 있고 그 아들이 결혼까지 했다. 상견례 때 나에 대해 너무 모르는 아버지의 행동에 시어머니는 여자의 촉으로 아버지가 같이 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내 입으로 말하고 자기에게 사죄의 말을 하길 원했다. 틈날 때 마다 끊임없이 물었고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주제를 바꾸거나 했다. 재환이 옆에서 타박을 주며 대화를 끊어주기도 했다. 가장 놀랐던 시어머니의 행동은 신혼 초 우리집에 와서 침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자고 있는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남편이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는데 잠이 잘 오냐며 한밤줌에 나를 깨웠다. 생활비 문제로 시아버지의 고성을 들은 적도 있고. 나의 마음은 시댁 때문에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재환의 정착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점점 더 희망을 잃게 되었다. 재환도 알고 있다. 자신의 부모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혼서류에 사인을 했다. 별거 생활을 하는 재환은 아이를 갖겠다고 마음을 바꾸었지만 나는 이미 재환에게 미움도 사랑도 없는 백짓장의 마음이 되었다. 

서부법원 앞에서 재환을 만나기로 했다. 정문 앞에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주차장에서 재환이 걸어 나왔다. 한껏 멋을 낸 모습이다. 보지 못한 새 바지와 깃을 새운 흰색 폴로반팔 셔츠를 입고 못보던 빨간 색 나이키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었다. 

-유정아, 지금 왔어? 
-응. 
-....
-....
-유정아. 
-...
- 유정아, 우리 이거 맞는 결정이니?
- 재환아... 나는 우리 관계가 지금 이혼하지 않으면 더 나빠질 것 같아. 너를 정말 미워하면서 한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헤어지고 안미워하는 사람으로 너와 남고 싶어.
- ....알았어... 유정아, 대신 우리 이혼해도 친구로 지내자. 가끔 술도 먹고 이야기도 하자... 그렇게...해줄수 있지?
- ...응. 그럴게. 나 너를 미워하지 않아.

법원에 들어가 서류를 사무관에게 제출하고 긴 복도로 안내되었다. 복도에는 부부들 수십명이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공기도 벨 수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정적. 재환과 나도 그 침묵에 동참하며 자리에 앉아 우리의 순서를 기다렸다. 

이유정, 유재환씨?
네~ 

판사실에 들어가니 사각 회의 테이블 저편에 사십대 중반의 안경을 낀 남자 판사가 앉아있다. 

두분 이혼에 합의하십니까?
네.
네.
두분 아이는 없습니까?
네.
네.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두분의 이혼이 결정되었습니다. 나가보십시오.
네. 
네 고맙습니다.

짧고 간단했다. 결혼할 때는 예단, 청첩장 인쇄, 신혼여행지, 살집 마련, 증인까지 필요한 꼼꼼한 혼인신고 서류까지 몇 달의 복잡했던 결혼 절차가 이렇게 단 세 번의 문장으로 끝이 났다. 두분 이혼이 결정되었습니다. 허망하고 후련하고 믿기지 않는다. 재환과 나의 6년 부부관계가 이렇게 툭 끊어졌다. 

이제 어디로 갈거야?
법원을 나오며 계단에서 재환이 물었다. 
회사로 가봐야지. 
데려다 줄까?
아니. 택시로 10분이야. 
그래... 연락할게.
재환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근데 나 살 것 같아. 힘이 나. 
...재환아... 난 힘들어... 하지만 네가 좋다니까.. 네가 원하니까..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이렇게 했어.
응. 알아. 나도 너도 철이 없었어. 결혼에 대해 우리는 성숙하지 못했어. 재환아 건강하고 술 너무 많이 먹지 마. 담배도 너무 많이 피우지마. 잘 가. 
그래. 너 먼저 가. 

재환은 나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을 것이다. 재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재환 회사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햇볕이 따스했다. 너무나 후련하다. 너무나 자유롭다. 이로서 끝이다. 지긋지긋한 시댁이라는 관계의 털실덩어리에서 깔끔하게 잘려나왔다. 이젠 시어머니, 그 여자분의 번호를 스팸으로 차단해야겠다. 진호는... 진호는 잘 살겠지.. 안스럽지만.. 나의 삶까지 같이 늪 같은 웅덩이에 있게 할 수 없다. 

띵~ 문자가 왔다. 

'술 사야지. 다음 술은 네가 산다고 했다.'

H다. 지난 주 이태리 식당에서의 조심스러운 첫 만남을 와인으로 긴장을 풀고 2차로 간 이자카야에서 우리는 동갑이니 말을 트자고 했다. 거기에 정아의 후배인 승무원 동생까지 합석하여 4명이서 유쾌하게 술자리를 갖으면서 단시간에 술친구가 되어 버렸다. 다음날 잘 들어갔냐는 안부전화에 이어 이틀에 한번 전화와 문자를 하는 H. H의 연락이 반가우면서도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서류상으로는 기혼녀였으니까. 나는 유배생활같은 별거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울고 있는 진호를 끊어내는 잔인한 이혼을 결정해야 하니까 웃어도 안되고 즐겨도 안되고 새로운 누구를 가슴에 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나는 이혼을 했다. 이제는 새로운 누구를 가슴에 담아도 되는 걸까? 





3. 그는 내 인생에 얼마나 가까이 들어올까? [소설] 가짜 연애

정아를 만나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정은 오늘 내 오피스텔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6시반에 사무실을 나섰다. 오피스텔 로비에 도착하니 45분. 늘 화려한 의상으로 잘 차려입고 서울 나들이를 하는 정아는 오늘도 어깨가 부푼 독특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정로에서 이태원까지 얼마나 걸려?
응. 택시타면 20분 쯤? 짐은 없네?
응. 1박만하고 가니까. 잠옷은 네거 좀 빌려 입고. 
그럼 놓고 갈 짐 없으니까 바로 갈까?  
화장실 한번 쓰고 가자. 

나는 정아의 사촌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미국에서 살다 왔고 나와 동갑이고 무역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남자라는 것. 사실 나는 정아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중학교때도 키가 컸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으며 가끔 센스있는 말을 해서 고독하면서 성숙한 소녀였다는 느낌 정도. 우리가 중학교 때 같이 떡볶이를 먹거나 소풍갈 때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적은 없다. 하지만 지난 동창 모임에서 단지 그 애가 싱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아와 스스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결혼 4년이 넘도록 애가 없어서 주변에서 아이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터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는 있냐로 시작해서 아이가 왜 없냐로 이어져서 결국은 자기 아이 이야기로 끝나는 대화. 정아와는 그런 대화가 아니었다. 과거 학창시절 이야기. 현재의 연애 이야기.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지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등등. 아이랑 무관한 얘기들. 나는 그것이 반가워서 정아에게 마음을 열었다. 내가 별거를 한다고 말하자 정아는 걱정보다는 놀라움이 먼저였고 나에게 더 자주 연락을 했다. 

-근데, 정아야. 내가 네 사촌한테 무슨 도움이 될 얘기를 해줄 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사업을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여성 속옷이잖아. 네 사촌은 뭘 수입하는데?
-나도 몰라. 네가 직접 물어봐. 
-사업한지는 얼마나 된거야? 아직 개업안한 거야?
-글쎄. 했나? 그것도 네가 직접 물어봐. 
-나이가 너보다 1살 많댔나? 그럼 오빠야?
-어릴 땐 오빠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오빠란 말 거의 안해. 학교가 같은 학번이라. 그애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다 와서 한국 물정을 하나도 몰라. 그래서 네가 한국 친구도 되어주고 사업하는데 궁금한 거 물어보면 알려주고 그러라구. 그냥 친구하라고. 걔가 적적하니까. 
-그래. 너가 만나자니까 만나는데 너도 별로 안 친한 친척같은데, 내가 친구가 되는 거는 좀 이상해. 
-아냐 아냐. 나도 서울 자주 올거구 앞으로 자주 볼거니까 걱정마. 일단 나가자. 

부슬비가 내리는 오후. 약간 차가 막힌다. 약속 장소에 8시 정각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 식사이다.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태리파스타집. 미국 식인가? 한국에서 친구를 8시에 만난다면 이자카야 같은 술집에서 바로 약속 장소를 잡을텐데. 정아의 취향도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니다. 이 약속 장소는 정아의 사촌이 잡았다고 한다. 정말 내게 사업적인 조언을 받으려고 이런 식사 접대를 위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쪽 붙박이 가죽 소파석에 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일어선다. 180 가까이 되는 큰 키. 얼굴은 검은 피부에 단정한 숱이 많은 커트. 타이까지 매고 정장을 입고 있다. 캐주얼 정장이 아니라 네이비색에 화이트 셔츠를 입고 얌전한 타이를 맨 수트 정장. 오마이갓. 정장이라니. 서른다섯의 나와 동갑이라는 나이가 양복 덕분에 서너살은 더 들어보인다. 가까히 가서 보니 피부는 좋지 않지만 이목구비는 아주 잘 생겼다. 특히 짙은 눈썹과 쌍겹이 진하게 된 큰 눈이. 신화의 에릭과 많이 닮았다. 정장입은 에릭.자리가 무겁게 느껴진다. 마치 비즈니스 파트너들의 저녁식사 같다. 

- 왔어? 
- 응 일찍 왔네. 
- 넌 오빠한테 자꾸 반말할래?
- 아이고. 한살 오빠인데 습니까? 십니까? 할까? 칫. 
- 앉으세요. 
- 네. 안녕하세요.

셋 다 자리를 잡는다. 마주 앉아서 보니 눈이 너무 커서 눈 마주치기가 부담스럽다. 느끼한 눈이랄까? 뭐지? 이 기분은? 동갑을 만나는 기분이 전혀 아니야. 매우 어려워. 양복 때문일까? 

- 말씀 많이 들었어요. 
- 네? 제 이야기를요? (어디까지 들은 거지?)
- 네. 쇼핑몰하시고 정아하고 중학교 동창이시라구. 
- 아~ 예.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 뭐라구 했는데요? 
- 예? 어... 사업.. 하신다고? 
- 아뇨. 아직 시작은 안했구요, 준비 중이에요. 참 성함이..
- 유정이요.. 이 유정입니다. 성함이..?
- 에릭입니다. 
네?? 

정아가 옆에서 뭐야, 너 ㅋㅋㅋㅋ 라며 깔깔 웃는다. 나는 곧 그것이 장난임을 알고 같이 웃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H라고 하자. 어차피 자주 이 사람의 이름을 부를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약간 떨리고 약간 긴장되고 조심스러워지는 이 기분. 뭐지? 너무 신중한데 신중하지 않은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 사람의 어색함은 뭐지? H.... 그는 내 인생에 얼마나 가까이 들어올까?  





2. 분위기를 띠우고 싶어서 나를 초대했겠지 [소설] 가짜 연애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니 희미한 조명 아래 검은 자동차 보닛위의 고양이들이 보인다. 바깥이 추워서 이렇게 주차장으로 들어와 잠을 잤나보다. 대담하게 보닛위에 있는 녀석도 있고 자동차 아래 타이어에 몸을 붙이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이 주차장에 있는 고양이들 숫자만 세어도 스무마리는 넘을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길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과 그 고양이들이 쓰레기 봉투를 찢는 게 싫어서 고양이가 사는 지하실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는 사람의 뉴스도 들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친근함이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저 많은 고양이들의 개체수 증가가 걱정되는 사람 중 한명일 뿐이다. 시동을 걸고 출근을 한다. 충정로에서 동교동까지는 정말 금새이다. 기계적으로 시동을 걸고 오피스텔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 길에 올라타서 잠깐 생각에 빠져 있노라면 차는 어느새 동교동의 회사 오피스텔 주차장을 진입하고 있다. 좀 더 드라이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30분은 떨어진 곳으로. 

안녕~ 
안녕하세요~!

매장 겸 사무실이 같이 있는 나의 회사로 들어선다. 3명의 풀타임 직원들이 매장을 지키고 있고 매장 카운터 뒤쪽을 벽으로 막아서 만든 책상 2개가 있는 사무실에는 나와 웹디자이너가 일한다. 긴생머리의 20대 초반 웹디자이너 윤아가 늘 그렇듯 웃음기 없는 우울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우울한 얼굴을 면접 당시에는 차분하다고 생각해서 채용을 했는데 시간이 갈 수록 이 아이의 사회성이 많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달 전에는 매장일을 총괄하는 신혜가 드릴 말씀이 있다며 얘기를 했다. 

사장님, 실은요.. 요즘...매장 시제가 비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응? 시제가? 
네...매장 문 닫기 전 제가 맞추고 가는데 출근하고 나서 세어보면 만원, 이만원씩 비어 있어요. 
그런 일이 있는지 언제부터인데?
그게 딱 윤아가 출근한 두 달 전부터에요. 
설마 윤아가 그랬을까? 
저희가 시제 빈 금액을 나눠서 맞춰 넣어놨는데 이런 일이 열번이 넘다 보니까 사장님한테 말씀을 드리게 됐어요...
그래... 어떡하지... cctv라도 달아야 하나?
네. 그렇지 않아도 cctv 달아주시면 여러면에서 좋을 것 같아요. 저희도 윤아 의심하는 것도 찜찜하구요. 
그래 일단 알았어. 내가 cctv 알아볼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시제 빌때 마다 얘기해줘.  

정말 윤아가 매장의 돈을 야금야금 훔치는 걸까? 나도 사실 의심이 가긴 한다. 이 아이는 입사해서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1주일 넘게 입원하셨고 쌍둥이 언니가 다쳤고. 조문을 가겠다고 병원을 알려달라고 하면 절대 못오게 하고. 소라를 어떤 말로 회사를 관두게 해야 할지 그것만이 지금은 관건이다. 적당한 이유를 찾는 것. 내 옆에 앉아 묵묵히 일하는 이 아이를 어떻게 말해서 내 보낼까. 골치가 아프다.  

간밤에 외국에서 들어 온 이메일에 대한 회신을 하고 재고가 빠진 물건들을 이메일로 외국에 발주하는 것이 나의 업무이다. 인터넷 쇼핑몰에 올라온 상품 페이지들을 살피고 잘 안나가는 제품들의 가격을 조정하는 것들도 속옷 쇼핑몰 사장인 나의 업무이다. 이미 회사를 차린지 5년 차. 익숙해진 일이다. 그리고 아직은 일이 재미있다. 

오늘 저녁에는 고향 친구인 정아를 만나기로 했다. 정아는 광주에서 미술학원을 하는데 최근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알게 됐다. 여자애들은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데 정아는 그 모임에 나온 여자애들 중 유일하게 싱글이었다. 서울의 우리 집에서 몇번 자고 가기도 해서 남편과도 안면이 있다. 내가 별거한다는 얘기를 하자 그렇게 착한 사람과 왜 헤어지냐며 이해를 못해했다. 정아는 요즘 서울에 자주 온다. 서울에 오면 꼭 강남의 성형외과에 가서 견적을 받는다. 서울에 오는 목적이 쇼핑과 성형외과 방문이다. 이미 늘씬하고 큰 이목구비를 가졌는데 가슴 확대 수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정아가 오늘 자기 사촌을 소개 시켜준다고 했다.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사촌인데 미국에서 막 들어왔고 무역업을 시작했는데 내가 사업을 하니까 같이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직원 4명있는 연매출 10억도 안되는 내 회사 스펙으로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저 사촌하고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불러서 분위기를 띠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 
   



1. 황홀하게 외로운 여행 [소설] 가짜 연애

'그 여자 작사, 그남자 작곡'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제목이 뭐더라. 아주 스윗한 노래. 계속 귓가에서 맴돌고 거리에서 라디오에서 내내 흘러나오는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며 잠에서 덜 깬 몸 상태를 천천히 이완시키는 중이다. 작은 거실의 아이보리 색 소파에 누었다. 린넨소재로 된 로맨틱한 둥글둥글한 선의 폭신하고 깨끗한 디자인. 별거를 하고 이 오피스텔에 들어오면서 질렀던 아이템. 제법 큰 2인용 소파인데 이 소파가 있으니 뭔가 내 집, 내 공간을 의젓하게 가진 느낌이다. 아직 2월 말. 곧 3월이 오겠지. 창밖으로 프랑스 문화원 정원을 내려본다. 이 오피스텔을 보자마자 계약한 이유는 바로 저 정원 때문이다. 이 집에 놀러왔던 선희는 "이게 무슨 프랑스 문화원 정원이야, 너의 정원이지!" 라고 말했다. 5층에서 프랑스 문화원이 자리한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과 소나무들, 촘촘하게 잘 관리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원을 내려다보는 뷰가 장담컨대 프랑스 문화원 사람들이 출근하면서 평면으로 바라보는 뷰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2월 마지막 주의 아침도 하루를 맞고 있다. 

커피믹스를 마실까 하다가 작은 밥솥에 밥을 앉히고 현대백화점에서 산 일본 미소스프를 풀어 국을 만들었다. 뜨거운 물을부어주니 마른 미역, 유부, 파가 풀어지며 뚝딱 국이 완성된다. 일본 붉은 무장아찌에 갓 전기밥솥에서 푼 밥 한공기 미소된장국. 소박하고 따뜻하고 고요한 나의 아침. 좋다~. 혼자가 되어. 약간 싸늘한 이 아침 날씨와 약간 훵한 이 홀로 사는 오피스텔과 달랑 짠지 하나인 이 밥상의 훵함이 좋다. 얼마만인가. 내가 이렇게 혼자 산다는 것은? 그러고보니 처음이다. 그렇네? 처음이네? 세상에! 어려서부터는 4형제와 부딪끼며 살았고 서울에 취직해서는 작은 언니와 한방을 쓰며 자취했고 남동생이 나중에 올라왔고 다시 엄마와 살게 되었으며 그러다가 결혼을 했으니까 내가 혼자 순수하게 자취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주 잠깐 외국에 어학연수를 갖다가 혼자 여행을 하면서 모텔이나 호텔에서 혼자 잠을 자고 일어나서 마신 블랙커피. 지금 그 냄새가 난다. 텍사스를 여행하며 모텔6에서 아침을 맞으며 타 마셨던 쓰고 뜨거웠던 인스턴트 블랙 커피와 함께한 아침.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건가? 

어젯 밤엔 아름답지 못한 일이 있었다. 남편이 오피스텔에 술을 먹고 찾아와 문에 쿵쿵 머리를 부딪히며 울다 돌아간 일... 너무 불쌍해서 하마터면 문을 열어줄 뻔 했다. 하지만 독하게 다 잡았다. 그렇게 그가 이 방에 들어와 잠들고 나는 아침에 그 사람을 깨워 회사에 보내며 다시 현실이었던 결혼 생활을 반복할까봐 무서웠다. 어렵게 결정한 별거를 다시 도로아미타불로 만들까봐 두려웠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지 않나. 꿈같이 달콤하고 쌉싸름한 혼자만의 황홀하게 외로운 여행을. 이 꿈같은 현실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오만한 내가 겸손해질 때까지 네가 계속 나타나겠지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종종 그의 꿈을 꾼다. 오늘 아침에 그는 지인들과 어울려 마라톤 대회를 참석했다. 그의 목에 걸린 두개의 은으로 된 메달을 보고 나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메달 땄어?" 나는 메달을 핑계로 그가 내게 차갑게 대하거나 말을 안할까봐 두려워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축하의 말을 건네려 했다. 그는 한때 연인이 아니라 그저 아는 사람에게 대답하듯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배시시 웃으며 "그냥 완주해서 받은 거야"라고 했다. 그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나는 몸을 움츠려 들며 아... 맞아... 나는 이제 그에게 아무도 아니지...라며 돌아섰다. 그게 꿈의 끝이었다. 눈을 뜨니 나의 어여쁜 아이기 내 옆에서 눈을 떴다. "엄마... 만화 틀어줘.."하며. 

헤어진 연인 중에 유독 그가 이토록 자주 꿈에 나오는 이유는 뭘까? 내가 그와 잘되었다면 뭐? 내 옆에서 눈을 뜬 아이가 그를 좀 더 닮은 아이가 되었을까? 그럴 리 없다. 현실적인 내가 그의 부모님, 형제들의 불합리한 요구를 견뎌냈을 리 없다.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지만 싱글인 그가 아버지를 그토록 괴로워했다면 결혼해서 그게 내 몫이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의 부모와 형제까지 가기 전에 내가 그와 너무 잘못된 끝맺음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잊었겠지. 오늘 아침 꿈에서처럼 그는 나를 다시 보더라도 나에게 무심하게 아무일 없던 듯 좋은 '사람'으로 나를 대할 것이다. 나와 헤어지고 그는 내 지인들의 모임에도 나올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저 이것은, 그러니까 그가 꿈에 종종 나오는 이유는 내가 그와 헤어질 때 그에게 너무 오만했고 내가 지금 그것을 무척 부끄러운 행동이라 여기고 창피해하기 때문이다. 그와 잘되었건 아니건을 떠나서. 그와 결혼까지 가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철이 없었다. 

오만하게 말을 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누군가로부터 핀잔이나 싫은 소리를 들은 기억이 몇가지가 생각난다. 철이 없었다. 어렸다. 그런 일화들이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 그런 일화들이 생각날 때 마다 다짐한다. 겸손하겠다고.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라고. 경청하고 교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서른 여섯쯤에 그와 헤어졌다. 나의 마지막 교만은 그를 내 멋대로 대한 것이다. 잔인한 방법으로 헤어졌고 내가 필요하여 다시 다가갔고 그리고 그를 믿지 못하여 진저리나게 그를 괴롭혔다. 그게 너무 부끄럽다. 그렇게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거짓말이라도 했어야 햇다. 내가 그보다 잘났다고 여긴 탓이다. 그가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고 그를 나의 추종자 정도로만 여긴 탓이다.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내 멋대로 그를 판단하고 편의대로 그를 대했다. 

교만해지지 말자. 지금 내 곁에 있는 아이의 아빠에게. 내 남편에게. 그를 보자. 그의 아름다움을. 이것이 내가 꿈을 꾸는 이유일 것이다. 잊지 말라고. 너무나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잃었고 후회하고 있고 그런 실수를 절대로 다시 하지 말라고. 

가수 G, 아름다움에 대하여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가수 G를 초대하여 노래를 듣고 와인을 마시며 그를 관찰한다. 여운이 길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오늘 금요일. 계속 떠오른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그림이나 글이 아니라 몸짓으로 목소리로 표정으로 때로는 그 모습 자체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사람은 매료된다. 나는 그의 큰 키와 작고 하얀 얼굴, 살찌지 않은 긴 팔과 다리에 매료되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멜로디에 다시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그래서 이토록 여운이 길다. 참 오랜만에 사람에게 흔들려본다. 나는 꼼수다를 들으면서 김어준에게 그의 지성과 인생관에 매료당한 이래 한 3년만인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게 부끄럽지만 한편 이런 설레임을 아직 가지고 있는 내 감성이 반갑기도 하다. 

그가 그룹으로 데뷔했던 시절 나온 방송들을 쭈욱 찾아 보았다. 한 팀원은 외모로, 다른 팀원은 예능감으로, 또 다른 팀원은 외모와 지성을 갖추었다면 G는 숫기없이 긴장도 잘하고 멋쩍어 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연예계라는 곳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일까. 그 대단함은 눈빛, 외모, 자신감, 몰입에서 나오는 매력들이 서로 불꽃을 튀기며 화면에 잡히기 위해, 멘트를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경쟁하는 곳일 것이다. 연예인 중의 연예인인 지드래곤은 그러니까 참 대단히 매력적일 테지. 혹은 자기를 숨기고 보여지는 모습을 잘 디렉팅하여 내놓았을 수도. 어쨌거나 매력의 근원은 재능이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갈고 닦은 노래 실력과 창법. 작곡 능력, 박자감, 외모는 재능이 뒷받침된 태도가 없다면 딱 5초짜리 그림일 것이다. 

부럽기도 하다. 재능이 발현하여 온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매력을 갖고 있는 연예인이. 나의 매력은 무엇일까? 뭔가를 주도하고 집행할 때 매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몰두하는 모습. 그것이 나의 재능일 것이다. 몰두하여 추진해서 결과물로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 

예술은 아름답다. 사람은 예술을 한다. 나는 그 아름다움을 감상한다. 나도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겸손하자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거만한 모습은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으니까.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까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공항에서 앞줄에 앉은 초등학생 남자애 둘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레고와 자동차를 올려놓고 같이 조립도 하고 자동차로 부딪혀서 멀리 나가기 놀이도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형제로 보이는 닮아 보이는 아이. 문득 어릴 땐 저렇게 친구, 형제와 같이 장난감이나 놀이를 하는 게 얼마나 가슴 꽉차게 재밌었는지 그 기쁨이 기억났다. 00야~ 노올자~! 얼마나 반가운 소리였고 신발도 채 다물어 신지 못하고 눌러서 끌고 신으면서 입안에 밥을 다 삼키지도 않고 우걱우걱 씹으면서 마당으로 달려나갔는데. 숨바꼭질, 고무줄, 잡기놀이, 자전거타기, 오징어, 등등 놀 거리 천지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둥 마는 둥 친구들과 만나서 어디론가 쏘다녔다. 성당에도 놀려고 나갔지. 아, 그때부터 연애감정이 싹터서 좋아하는 오빠들이 보이면 설레여서 그 맛에 도서관이고 성당이고 다녔던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 늘 친구가 있었지. 늘 여럿이 놀았다.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로 꽉 막힌 삶을 친구들과 수다, 떡볶이 먹는 것으로 풀었다. 대학에 와서는 연애,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 대학에 와서는 이성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싱글일때도 여자 친구들과 지방이나 해외로 때론 홀로 여행을 다니면서 놀았다. 그 싱글 생활을 지겹도록 할만큼 다 하고 혼자 노는 게 지겨울 때 지금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지금 살고 있다. 

지금 나에게 놀이는? 없다. 스마트폰을 볼 것도 없으면서 멍하니 보는 것. TV 드라마를 몰아서 보는 것. 동네 이웃들과 술을 마시는 것. 정말 요즘 내겐 놀이가 없다. 책을 읽는 것도 심드렁하다. 공항의 남자 아이 둘이 몰두해서 노는 것 같은 가슴 꽉 차는 재밌는 놀이가 없다. 회사일을 할 때. 그때 몰입한다. 돈 버는 재미. 그게 요즘 나의 유일한 재미이다. 뭘 해야 재밌을까? 스마트폰이 손안에 들어온 후로 나는 재밌는 일들을 많이 잃은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SNS를 들여다보는게 얼마나 시시콜콜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하루에 두세번은 꼬박꼬박 본다. 어쩜 이제 곧 모든 SNS를 끊고 스마트폰도 그냥 유용한 어플 사용 용도로만 이용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대체할 나의 놀이는? 내가 몰두해서 할 수 있는 놀이는? 무엇일까? 아이와 놀기? 책 읽기? 나는 무얼할 때 즐겁지? 

확실한 하나는 이제 SNS가 지겨워졌다는 것. 

'또 오해영' - 삶은 판타지이기도 하고 찌질하기도 하고 [후기] 영화와 책

11회까지 보고 종영 것까지 대충 돌려서 봤다. 서현진이라는 섬세한 배우와 기발하고 정성스러운 시나리오, 그리고 제작진의 경쾌한 편집과 구성까지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판타지일것이라고 생각한 박도경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느낀 지점부터 더욱 끌려들어갔다. 과거, 미래, 현재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은 하나이고 육체만이 변할 뿐. 마음은 모든 걸 다 알고 있고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마음이 채워졌느냐, 아니냐 
후회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 
만이 중요하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꽉 채워주는 이런 기분 처음이야"

찌질하고 쳇바퀴돌고 먹고 일하고 자고 씻고 살아가는 찌질한 일상은
사랑을 할 때 판타지가 된다. 
아픈 사랑이건 채워지는 사랑이건. 

그 아픈 사랑과 사랑이 채워져가는 과정을 연기해낸 서현진이라는 배우는 정말 보석같다. 
서현진 배우에게 감사하다. 마흔셋의 감성 건조증 기혼녀에게 촉촉한 사랑의 추억을 회상해내는 시간을 주어서. 
배우도 '家'자를 붙여야 하는 직업같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시간을 반추하게 하고 작품에 빠져 내 상처를 들여다보게 해주니까. 
작가, 화가처럼 연기가라고 불러야한다. 

오해영에서 빠져나와 나는 오후 1시반, 다 외출한 집안에서 개밥을 챙겨주고 고구마를 먹고 커피믹스를 들고 책상에 앉아 드라마를 본 여운을 남기고 있다. 오후햇살은 찌질한 나의 일상을 너무 쨍~하게 비춰준다. 

미래를 알 수 없어서 인생은 재밌다 하지 않았는가. 나의 지극히 메마른 일상에 어떤 돌이 날아들지 방심하지 말지어다. 아니, 방심하고 있어라. 대비한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니. 

가슴이 허~하다. 


아래 집 누수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밤 11시, 빌라 101호에서 전화가 왔다. 사일 전인 월요일에 한두방울 샌 물이 금요일에 외출하고 와보니 뚝뚝 양동이를 받칠 정도로 새고 마루까지 흥건히 젖었다고. 다급하게 빨리 누수를 불러달라고 하여 월요일에 부르자고 했더니 가스검침기에서 누수 사인이 뜬다며 내일 바로 불러달라고 했다. 

골치아프게 생겼다. 누수는 부르는게 값일텐데. 인터넷을 검색하여 공사실적이 많은 업체로 불렀다. 4시간을 탐사했으나 약한 싱크대 온수관 누수외에는 못찾겠다며 철수했다. 40만원 청구. 다시 누수가 있으면 그때 와서 찾아야겠다고. 

그게 토요일이었는데 이틀뒤인 오늘 아침 101호에서 연락이 왔다. 아직 누수는 없으나 금요일에 젖은 천장 쪽 형광등이 나갔으니 사람을 불러 형광등을 갈겠다, 가스검침기가 시끄럽게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스검침기와 세콤 연결을 누수기사에게 요청하여 떼어놓았는데 덕분에 인터폰이 안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므로 인터폰 연결 출장비를 나보고 내라고 한다. 

아침 운동을 하다 그 전화를 받으니 스트레스 스트레스... 월세 내고 돈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101호 여사는 201호 세입자가 문신시술을 하는 사람이라며 알고 있었냐고 묻는다. 살 타는 냄새 운운하며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남편은 이후 전화는 자기가 통화하겠다. 누수 원인이 우리쪽으로 밝혀지면 전액 지불, 그 전까지는 지불 보류. 

다행인건 내가 101호 아주머니를 매일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전화로만 소통한다는 것. 

집을 사서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사람과 사람이 거래를 하고 돈이 오가는 것은 힘든 것인데 그 거래가 거주하는 집이라면 크고 골치아픈 문제가 있는 것이구나. 말을 들을 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단하지 말자. 아직 듣지 않은 말을 예상하지 말자. 아닌 일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하자. 모르면 알아보고 해결책을 제시하자. 합리적으로 해결하자.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지 말자. 냉정하게 듣자. 미리 예단하지 말자. 미리 걱정하지 말자. 해결책은 다 있다.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너무 귀담아 듣지 말자. 

사람 사이 문제 해결, 참 힘들다. 박원순 시장은 그러고보면 대단하다. 



화풀이의 고리를 끊는 일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어제는 논현동 일대를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녔다. 알바생 두 명 면접을 보고 디자인 미팅까지. 점심을 오후 3시 반에 먹을 정도로 바빴다. 날씨는 전날과 달리 더웠다. 해는 쨍쨍했고 학동역 골목은 오르막이 많아 캐리어 끌기가 힘들었다. 주차장이 보였다. 샷시로 삼면을 막은 커다란 공터에서 주차장 영업을 하고 있었다. 터가 굉장히 넓은 것이 꼭 대형 건축물을 올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매장 주차장이 협소해서 방문객 주차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보 2분 거리에 주차장이 있다니 반가웠다. 관리인 한 명이 입구 컨테이너 박스에 있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저 여기 주차비가 1시간에 얼마에요?
4천원이요.
여기 명함 있었요? (주소를 알아야 손님들에게 주차장 안내를 해줄 수 있으니까)
저기 전화번호 있잖아요. (창문의 휴대폰 번호와 주차비 안내 문구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아, 네.... (전화번호와 주차요금 문구 사진을 찍는 나)
저 혹시 이 주차장 계속 영업하는 거죠...오?
뭣 땜에 그러는데요? (화내는 말투... 나, 기분 나쁘지만 설명한다)
저희가 매장 운영하는데 손님 주차 안내를 여기로 하려구요 (나는 이상한 사람 아니고 일땜에 물으니까 그렇게 화내지 마시라고요)
보내면 되지. (누가 안보낸다구 했나. 이 주차장이 곧 건물 들어설 준비하는 공터같은 분위기라서 묻는 거라구!)
혹시 여기 임시로 운영되거나 그러는 거 아니죠? (아니라고 또는 모른다고 말을 해주시오~)

내 마지막 질문에 그 중년남은 나를 벌레보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시선을 돌렸다. 순간 어찌나 불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싸울 수도 없는 시시비비 거리. 그냥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나를 보험아줌마로 봤나? 내 질문이 그렇게 한심했나? 그 중년남은 처음부터 뭔가에 화가 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그의 화난 기분을 더 상승시킨 것 같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다 멈추고 돌아서서 그 컨테이너 박스를 계속 쳐다봤다.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기분나쁘게 하나. 왜 나의 오후를 망치나? 난 그저 주차장의 영업 지속가능성을 물었을 뿐인데 그게 물어서는 안될 질문인가? 그게 그 중년남을 기분나쁘게 하는 질문인가?

기분이 마구 마구 나빠졌다. 간판하는 사람이 전화가 왔다. 대답을 하다가 나는 하마터면 간판 수리하는 사람에게 짜증을 낼 뻔했다. 내 짜증은 100% 주차장 관리인이 전해준 것에서 기인한다. 참자... 후... 참자.... 날도 덥고 기분 안좋다고 내가 짜증을 내면 이 짜증은 또 간판하는 사람에게 가서 그도 누군가에게 짜증을 낼 것이다. 후.... 한숨.. 내쉬고... 들이마쉬고..후... 끊자 이 고리를 끊자. 내가 끊으면 강남, 서울, 어쩜 경기지역까지 전파될지 모르는 짜증의 순환고리를 끊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나는 수많은 사람의 오후 평화와 정서적 건강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짜증과 어쩌면 폭력과 범죄까지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제 대단히 훌륭한 일을 했다. 대한민국 평화에 큰 기여를 했다.

오늘은 어제의 짜증이 다 잊혀졌다. 그래도 그 중년남에게 작은 재수 없는 일이 하나 일어나면 좋겠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오랜만에 이글루를 로그인하고 내 옛글들을 읽어봤다. 2개의 글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연애와 남녀, 결혼에 관한 고찰을 한 글인데 다시 읽어도 재밌고 내가 이런 상상력을 동원했다니 대견하고 신기했다. 

3년 전 두달 동안 매일 아침 책상에 붙어 한두시간씩 쓴 글을 가지고 책을 내었다. 그 한두시간 글을 쓰기 이전에 두 달간 혹독한 글쓰기 교실을 다니며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달간 쓴 원고가 출판사에 픽업되어 계약금을 받고 책으로 나왔다는 건 요즘 같은 도서시장 불경기에 행운이었다. 

애를 낳고 회사일이 바삐 돌아가면서 글을 통 못쓰고 있다. 육아보다 더 문제는 회사 일이 바빠지고 회사가 커지면서 인원관리, 매출관리를 하느라 시간도 없어지고 머릿속이 온통 이성적인 사고들 - 문제 발생, 빠르고 효율적인 해결 - 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람 한점, 꽃 향기 한 숨도 없이 나의 머릿 속, 가슴 속은 딱딱하고 건조하다. 

나는 왜 글을 쓰나? 
쓰고 싶어서이다.
글을 쓸 때 집중이 잘 되고 평화롭고 타이핑을 하는 손과 머릿속에 마구 마구 고개를 들고 문장들이 솟아나는 그 순간 나는 완전한 몰입을 한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나?
나의 삶에 관한 글, 사람에 대한 관찰, 삶에 대한 관찰, 사랑에 관한 것, 결국 사랑이니까.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우정도 나쁘지 않다. 새로운 문화적 자극도 좋은 글 거리이다. 

나는 어디에 글을 쓰고 싶나?
이글루에 남긴 2개의 상상력을 발휘한 글 중 1개는 제법 문제적인 글이여서 열명이상의 모르는 이웃들이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무심한 듯 대답하지만 나는 그런 소통이 아주 즐거웠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 공개한다. 그리고 소통한다. 안좋은 댓글에는 무심하게 신경안쓰는 듯. 좋은 말보다 그런 돌발적인 자극도 좋다. 욕만 안한다면. 

나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솔직하게. 가식없이. 내가 알지 못한 것을 아는 척 하지 않고 내가 느끼지 않은 것을 느낀 척 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고스란히 담는 글을 써야 한다. 남에 보여주어 무엇하리? 멋있어 보이려고? 멋있어 보여 얻는게 무엇이리?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멋있어야 멋있는 거지. 멋있어 보이려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멋쟁이 자격 상실~ 나에게만 집중하여 글을 쓰자. 

쓰자. 쓰는 동안 평화롭다. 이것은 심장과 뇌를 가장 즐겁게 릴렉스 시키는 운동이자 힐링이다.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괴롭고 후회가 남는 사랑이 고마운 요즘 [관찰기] 결혼이란

그와 꼭 닮은 탤런트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일일드라마 주연으로 출연하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노총각 탤런트. 잔털과 번질거리는 피부까지 그대로 보이는 고화질 사진이 잡지 한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휴...아직도..' 아직도 그 얼굴에 심장이 떨리다니. 참 많이 닮긴 했다. 그와 만날 때도 그를 닮은 이 탤런트가 TV에 나오면 기분이 묘했었지. 그를 마지막 본게 언제지? 2010년인 것 같다. 그러니까 6년이 흘렀다. 그는 아마 결혼을 했겠지? 나도 그 사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고 있다. 아직도 나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 메이크업을 하고 최대한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나선다. 공항은 누군가를 우연히 만날 확률이 높은 장소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헤어진 옛애인들에게는 단정하고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그에게는.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잘 사는 사람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아 예의도 바른 남자였다. 나는 내가 상대해보지 못한 세상의 이 남자를 만난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와의 만남을 아주 나쁘게 망쳐버렸다. 그는 그리하여 나쁜 남자가 되었고 나는 그와의 관계를 아주 나쁘게 끝맺었다.

'나쁜'이라는 말은 상대적인데 나도 그를 만나던 시기에 또 누군가에게 나쁜 여자이기도 했다. 연애에 있어서 나쁜 사람이란 말은 덜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덜 끌리고 덜 좋아하고 덜 아껴서 덜 다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쁜 사람에게 당하는 순진한 상대방은 나쁜 그 사람을 과하게 좋아하고 과하게 아끼고 과하게 다정하게 대한다. 나쁜 남자였던 그도 나를 만나기 이전 누군가에게는 순진한 남자였을 수도 있고 이후에 그리 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왜 그리 나빴나? 같은 질문. 나는 왜 그리 그를 지나치게 좋아했나? 만약 내가 그를 지나치게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니, 지나치게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고 감정의 교감을 차분하게 지켜보며 천천히 사귀었다면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다정한 남자가 될 수도 있었다. 처음에 그를 만난 얼마간 나는 바쁜 척도 하고 밀당도 조금 했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너무 설레여서 길게 내 감정을 위장하지 못했다. 그를 보면 얼굴 표정이 환해졌고 그와 만나는 내내 심장이 뛰었다. 그의 전화벨, 문자 알림이 울릴 때 그 순간의 공기 냄새와 주변에 흐르던 음악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가 나쁜 남자로 변한 순간은 첫 키스와 첫 잠자리 후 서른 중반의 여자가 순진한 얼굴로 우리 이제 사귀는 것 맞지?라고 물어본 순간부터였다.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그 후로 연락이 뜸해졌다. 그가 연락이 없을 때, 내 전화를 받지 않을 때 나는 마음이 아팠고 그를 너무나 그리워했다. 그가 연락을 하면 서너통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3년 여를 서로 사귀는 사람이 있는 가운데 (나는 그러하였고 그도 그러하다고 누군가를 통해 들었다) 외롭고 울적할 때 만나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잤다. 그가 원했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유부남이 상대 여자가 그가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만나고 그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그를 구속하지 않고 부인과 헤어지라고 요구하지 않는. 그는 내가 누굴 사귀는 걸 알때도 질투하지 않았다. 그의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나?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그에 대한 나의 소중한 감정을 희석시키다가 전화로 말다툼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학부형이 되고 허리사이즈가 1인치 늘어나서 다이어트를 걱정하며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정기적으로 염색을 하는 40대가 된 지금. 나는 가끔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토록 갖을 수 없어서 괴로웠던 그와의 사랑(일방적이었지만)을 더듬어 본다. 잡지를 펼치다가 그를 만난 배우의 얼굴에 흠칫 놀라 한참 동안 그 배우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은 마치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점프대에 섰던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발끝 아래 보이는 허공. 등뒤에 나를 잡아줄 밧줄이 있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그 팽팽함이 느껴지지 않아 맨몸으로 뛰어 내리는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고공점프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 없어 숨을 고르며 두려움을 다 잡는 심정.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남편과 굿나잇 키스를 하며 잠자리에 드는 평온한 일상에 잠시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누군가를 이토록 가슴아프게 좋아했던 괴로운 순간을 기억하며 심장이 뛰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내 등뒤의 밧줄이 나를 지켜준다.

너무나 가져보고 싶었는데 못 가진 사랑. 어떻게 했어야 그와의 만남을 덜 망칠 수 있었을까 가끔 과거의 시간을 내 마음데로 다시 돌려보곤 한다. 감성 주머니는 점점 쪼그라들고 이성 주머니만 부풀어가는 중년의 요즘. 괴로워서 오랜동안 각인된 이 감정이 소중하다.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좋아했던 그 기억이 괴롭지 않고 아름답다. 내 중년을 잠깐 잠깐 싱그럽게 한다.  







상도리 vs 상암동 [일상기록] 오늘의 느낌

제주로 이사 오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상암동의 실버타운이었다. 은퇴한 부유한 노인들을 위해 동호회실, 사우나, 수영장을 갖추고 세련된 정원과 통유리 파티룸까지 갖춘 고급 아파트라서 드라마 촬영도 종종 하는 럭셔리한 곳이었다. 나는 홍대에서 가깝고 공원이 있는 곳을 찾다가 상암동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갔다가 8층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의 연두색 신록에 반해 월세로 그집을 계약해서 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아파트는 부유한 노인들을 흡수하지 못해서 나같은 당시 싱글이나 아기가 있는 가족, 신혼부부, 연예인들이 많이 입주했다.

상암동 그 곳에서 1년 반을 해외 리조트에 잠시 이민왔다 생각하고 잘 살았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 공원, 노을 공원도 가고 걸어서 10분 거리인 CJ 미디어 방송국에 가서 엄마와 SNL 코리아 방청도 했다. 연예인 누구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친절하게 현관문을 열어줬다는 얘기를 몇몇 사람들에게 술자리에서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제주도에 이사하여 산지 1년 반. 1주일에 1박2일 홍대 사무실에 왔다가 제주로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상암동이 떠오른 건 대학원 동기가 어제 카톡으로 상암동을 지나다가 예전 누나집을 지나며 누나 생각했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나는 상암동을 떠올리며 그 문자를 계속 들여다봤다. 가슴이 왜 이렇게 허~하고 싸~할까. 지금 상암동은 CJ 미디어 외에 MBC, SBS, JTBC 등 방송국의 본부가 모인 미디어 타운이 됐다. 그리고 곧 롯데몰도 들어설 거라고 한다.

아마 내가 동기의 문자를 들여다보며 든 묘한 기분은
바로
반대되는 것들의 극과 극을 체험한 이질감
때문인 것 같다.

화려한 싱글  vs 포근한 가정
호화로운 고층 아파트 vs 투박한 2층 돌집
분초를 다투는 미디어 중심지 vs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구좌읍의 상도리
넓고 반듯한 계획 도시 vs 휘어지고 좁은 돌과 흙길

이런 상반된 곳을 1년 반 간격으로 경험하고 있는 내 몸이 그 이질감을 기억하며 주춤한다.

어느 것이 더 좋을까? 나는 새로운 것을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도시와 읍리 시골을 오가는 이 삶을 아주 즐긴다.
일주일에 한번 1박2일 도시로 가출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라 신선한 휴가이며 시골의 삶을 더 좋게 돋보이도록 한다.
제주에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런 얄미운 말로 상대방의 속을 긁어 놓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서울 엄마들에게 미안할 지경이에요"
상반된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매일 그 극과 극을 체험하기에 가능한 감탄이다. 그냥 상도리에만 살았다면 지겨워했을 것이며 이렇게 감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려한 싱글의 추억을 불러온 상암동이라는 단어. 예능 프로 '나 혼자 산다'를 보며 싱글 적의 그 단출하고 자유로우면서 때때로 밀려오는 공허함을 다시 회상한 것과 같은 기분이다.  

남편과 다투면 늘 드는 생각. 
하나는 외롭고 둘은 귀찮다. 

외로움이 극에 달하면 결혼하고 
귀찮음이 극에 달하면 이혼하겠지.

싱글은 외롭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곳을 누벼보시라~
결혼자는 파트너가 귀찮지 않도록 혼자의 시간을 때때로 갖으시라~



일주일에 1박2일, 읍리에서 도시로 가출하는 결혼자의 현재 삶이 아주 좋다.  



 


Day 11. 실연 극복 완료.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헤어진 연인이 올 9월에 결혼한다는 엄마의 정보는 오보로 판명됐다.
그는 6월 첫주에 결혼했다. 

내 생일 파티를 위해 친구들과 모인 지난 주 금요일, 
나는 헤어진 연인이 내일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 대신
연애를 시작한지 열흘째라는 소식을 전했다.
친구들의 탄성과 새 연인에 대한 쏟아지는 질문으로
나는 그날 구름위를 떠다니며 얼굴에 열꽃을 피운 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실연 극복 완료. 다시 사랑 시작.

내 인생에서 꼽아보자면 넘버 2에 해당할 만큼 힘들었던 실연으로 인해
나는 겨울동안 눈물과 무기력함 속에서 석달을 겨우 견뎌냈다.

봄이 오자 무기력함이란 이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먼지를 털고 창문을 연 뒤
나를 치유할 방법을 하나 둘,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다녔다. 제주도를 다녀 왔고 올레길을 걸었다.
여러가지를 했다. 동호회에 가입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책쓰기 교실을 다니며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의 뇌는 비로소 이성적으로 다시,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매일 노트에 과거의 일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어 나갔다. 생각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그러다 어느 날, 헤어진 이유가 분명함을 알게 됐고 헤어진 것이 참 다행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이 오더라. 헤어짐의 슬픔을 잊고 이성적으로 판단까지 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결국 오더라.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나는 내가 아닌 나로 평생을 살면서
내가 나일 때를 싫어하고 부끄러워 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은 채 남을 사랑하는,
거짓 사랑의 힘으로 위태롭게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아니, 그 위태로운 사랑이 평생을 가기나 했을까.

그는 결혼을 했다.
그가 주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내게 없는 것을 달라는 그를 원망하는 나를 깨끗이 잊고,
그가 주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그녀에게 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할 것이다. 

두개의 계절을 보내고 나는 여름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내가 나여서 감사하고 내가 영원히 나이기를 바란다는 남자를 만났다.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매일, 매순간이 감사하다. 

내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단게 된 것은,
전보다 많이 겸손해져야 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은, 
전부 다,
뼈아픈 실연으로 인해서이다.  

우리는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아프고 
견딜 수 없이 많이 아프고
그리고 어느 봄,
슬픔의 늪에서 걸어 나와
다시 창을 열고
햇살과 바람의 어루만짐 속에 
걷고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 묻고 답하고 
성숙해진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한 상대를 알아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한지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둘은 서로에게 끌려서 
전에 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사랑을 하게 된다.  

실연극복 포스팅 종료. 

다시 사랑.  




마지막 레시피
실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인 남녀가
알에서 깨고 나와 
성숙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아프지만 효과적인
성장발효제이다.


신 모계사회 [관찰기] 결혼이란

유부남 친구 둘을 만나 술을 마셨다. 내가 동호회에 가입하고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문화를 예찬하고 14만 마일을 제하고 유럽행 일등석을 질렀다는 말을 하자 둘은 부럽다고 말했다. 표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 역시 내 자유로운 싱글라이프가 그 순간 더 빛이 나는 걸 느꼈다. "너네는 아이들이란 보석을 창조해냈잖아. 나는 그런 보석이 없구" 라고 말을 붙였으나 돌아오는 싸늘한 시선.. 아.. 괜히 말했구나. 그들이 여자였다면 내 말에 잠깐이라도 "맞어! 내 소중한 아이들이 내겐 있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아버지는, 남자는 그러하지 않았다. 

여행을 한번 가려해도 아이들, 와이프, 부모님을 대동한 가족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 파티를 하거나 유럽을 훌쩍 떠나거나 홀로 문화활동을 한다는 것은 와이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잠깐 이런 상상을 하게 됐다. 

 ** 신 모계사회 **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다가 아이를 낳는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남자는 출산을 지켜 본다. 아이를 낳았지만 둘은 살림을 합치지는 않는다. 여자는 여자의 엄마와 형제들과 함께 아이를 가족들 속에서 키운다. 남자는 여자와 간혹 연락을 하며 일년에 서너번 크리스마스 전후, 아이 생일, 여름 휴가를 아이와 함께 보낸다. 아이를 낳으면 국가에서 한달에 50만원씩 아이가 15살이 될 때까지 여자 통장에 입금을 한다. 유치원 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무상 교육이다. 교복, 준비물 모두 국가에서 나오므로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남자는 연말에 연봉의 10%를 아이 양육비로 국가에 의무 납부한다. 남자가 수익이 없으면 납부하지 않지만 만약 수익이 있었는데 이걸 숨기고 국가에 허위 신고한 경우에는 국가에서 적발하여 5배로 징수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거짓 신고를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여자는 남자의 양육비 10%를 국가에서 입금 받아서 이 돈으로 아이의 바이올린 레슨비나 여행이나 어학연수 비용으로 쓴다. 남자는 대개 평균 두 명의 여자에게서 두 명의 아이를 낳으며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한다.    

여자는 엄마와 언니와 남동생들과 함께 집안에서 아이를 기른다. 아이는 할머니, 이모, 삼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다. 일년에 서너번 아빠를 만나서 축구도 하고 캠핑도 가면서 아빠와 유대관계를 갖는다. 엄마는 아이가 5살 쯤이 되어 어린이집에 가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춤 동호회나 운동 동호회 등에 가입하여 사교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여자는 거기서 만난 남자와 연애를 한다. 주말에는 아이를 가족에게 맡기고 애인과 1박2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어떤 여자는 이직을 하는 시점과 맡물려서 아이를 데리고 해외에 나간다. 짧게는 두달, 길게는 일이년 간 미국이나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아이를 공부시키며 여자도 어학연수를 같이 하거나 호텔경영이나 미술사 공부나 국제회의관리 등의 그 나라의 선진 지식을 배워 수료증이나 자격증을 취득한다. 한국에 돌아오면 여자는 이런 수료증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더 좋은 회사로 취직을 한다. 아이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한다. 여자는 대개 한 명이나 더러 두명의 아이를 낳으며 평생 여러명의 남자와 연애를 한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도 남자가 떠나지 않고 자신 곁에 있길 바라면 남자를 설득하여 '독점동반자계약(=결혼)'을 맺는다. 이 계약은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 만날 것과 남자의 부모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며 남자도 같은 의무를 지는 것에 동의할 때 성립한다. 복잡한 서류 준비와 절차를 거치는 '독점동반자계약'은 국가에서 공인하며 이 계약에 사인을 하면 남자는 소득의 10%를 공제하는 양육비 의무납부에서 자유롭게 된다. 양육비는 국가가 관여하지 않고 여자와 남자 둘이 알아서 한다. 국가에서 나오는 50만원의 아이 양육비와 무상교육은 동일하게 부여된다. 하지만 이 '독점동반자계약'을 파기할 경우에는 계약을 맺은 시점부터 생성된 남자와 여자의 재산을 무조건 반으로 양분하므로 여자와 남자는 모두 신중하게 계약에 임한다. 

10% 미만의 사람들이 이 계약에 사인을 하며 90%의 부모는 비계약자들이다. 10% 미만의 계약자들 중 계약이 실제로 평생 지속되는 경우는 절반 정도이며 절반은 계약을 파기한다.  

   



코가 두 개인 사람들이 사는 마을 이야기. [관찰기] 결혼이란

마을 사람들은 원래 코가 하나인 채로 태어난다. 하지만 스물다섯 쯤이 넘으면 얼굴에 코를 하나 더 붙여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라서 모든 여자들은 왜 코를 하나 더 붙여야 하는지 묻지 않은 채 그 전통을 따랐다.

코를 하나 더 붙이기 위해서는 새 코를 잘 골라야 한다. 코가 하나인 여자들을 위해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를 통해 새 코를 소개해 주거나 학교나 직장, 혹은 길거리에서 그녀가 직접 자기 얼굴에 붙일 새 코를 찾기도 했다. 그렇게 찾은 코가 내 얼굴에 잘 붙을 것 같다 싶으면 주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코를 붙이는 의식을 거행한다.

저는 이제부터 코가 두 개에요~라고 신고를 하는 의식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코가 두 개니까 숨쉬는 것도 전과 같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들 코가 두 개니까 너도 빨리 코 두 개를 달길 잘 한 거야. 나이 들면 피부가 늙어서 코를 붙이고 싶어도 잘 붙지도 않는다니까~ 라면서 기뻐해준다.

코 두 개를 붙이고 사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불편하다. 늘 코가 한 개이다가 갑자기 두 개가 됐기 때문에 가렵기도 하고 잘 붙지도 않는다. 새 코가 잘 붙도록 세수를 할 때도 조심해야 했고 잠을 잘 때도 조심히 머리를 뉘어야 했다. 운 좋게 새 코가 내 피부와 딱 잘 맞아 마치 전에 있던 코처럼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여자도 있었다. 백 명에 한명 있을까 말까 한 이런 운 좋은 사람들은 내 피부에 딱 맞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맞춤 코를 찾은 행운에 감사하며 기뻐했다.

그러던 중 다른 마을에 다녀 온 여자들이 그 마을에는 코가 하나인 사람도 많고 코를 늦게 붙여도 피부에 잘 붙었으며 새 코가 얼굴에 염증을 일으키면 코를 떼버리고 다시 코 한개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더라는 얘기를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여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왜 코가 두 개여야 할까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고 불편한 코를 왜 꼭 붙이고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코가 잘 붙지 않아 얼굴이 곪고 피가 나는 여자들 중에는 용기를 내어 코를 떼버리고 코 한개로 돌아오는 돌싱코(돌아온 싱글 코)도 생겨 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모름지기 코가 두 개여야 사람다운 얼굴인 것을... 코 하나 가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코가 두 개여서 얼굴에 염증도 나고 피고름도 나보고 해야 인생인 것을... 제 몸 하나 편하자고 가족들 망신시키면 코 한개로 살다니... 하늘이 정해준 코를 제 맘대로 뗐다 버렸다 하다니... 말세다.. 말세!

코 한 개인 젊은 여자들은 의문을 품었다. 어른들 중에는 붙인 코가 얼굴에서 계속 떨어져서 집에 있을 때는 코를 아예 떼놓고 있다가 밖에 나갈 때만 화학본드로 임시로 붙이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어머니 세대를 통해서 봤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여자들이 코가 두 개여야 완벽하다는 어른들의 말보다 내 피부가 아프지 않고 평화로운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영이는 돌싱코이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전부 코가 두 개다. 영이의 베프 숙이도 코가 두 개다. 숙이의 새 코는 중간에 잠깐 흔들 흔들 떨어질 뻔 했지만 다시 제자리에 잘 붙어 있다.

영이는 코가 한 개 인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코가 한 개라서 세수도 빨리 끝내고 화장도 금방 끝낼 수 있다. 잘 때도 엎드리건 모로 눕건 간에 원래 내 코 하나 뿐이라서 코가 떨어질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불편할 때는 코가 두 개가 아닌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가족들과 오다 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의례 건네는 “언제 코를 붙일 건데, 빨리 붙여야지.”라는 애정없는 걱정 두가지 뿐. 그런데 최근에는 베프인 숙이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이 코가 두 개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코 한 개인 본인의 모습이 어색하고 초라해 보이는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이는 숙이와 이야기를 했다.
“난 코가 한 개여도 행복한데, 너네들 모두 코가 두 개라서 점점 위축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난 코가 한 개인 친구들하고만 놀아야 할까봐...”

숙이는 대답했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하는 줄 우린 몰랐어. 우리는 네 코를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몸에 익었다지만 그래도 붙인 코 때문에 신경 쓰는게 한두 개가 아니야. 젊었을 때처럼 코 하나만 있으면 바람 부는 곳, 물 속, 숲 속 어디라도 자유롭게 다닐 텐데 지금은 붙인 코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 있잖아. 갈 때 준비할 것도 많고. 우린 네가 부러워 이것아”

코가 한 개인 영이는 새로 붙인 코와 한 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콧구멍 네개로 더 많은 산소를 마시며 복작복작 살아가는 친구 숙이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코가 두 개인 숙이는 코가 한 개여서 거추장스러울 것 없이 자유로운 영이가 부러우면서 한편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영이는 아직도 새로 붙일 코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 피부에 평생 붙이고 살아갈 내 피부에 잘 맞을 코를 열심히 찾아 다니고 있다. 코가 한 개여도 불편하지는 않지만 코가 두 개인 삶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정말 더 늙으면 내 얼굴에 붙이고 싶은 코를 찾아도 피부가 늘어져서 코를 못 붙이는 상황이 올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 코나 경솔하게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코를 붙였다가 잘 안 붙어서 고생했던 경험과 그 코를 떼어내면서 생긴 흉터가 아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다시 붙일 코는 잘 알아보고 신중하게 선택할 것이다.

아직도 영이는 왜 꼭 코가 두 개 여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다들 코가 두 개인 세상에서 코 한 개로 살아가는 것이 두렵고 쓸쓸한 것은 사실이다. 이 쓸쓸함이 어서 코를 붙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크게 작용하는 요인이다. 

영이는 세상에 코가 두 개인 사람이 반, 코가 한 개인 사람이 반이 돼서 코 한 개인 사람이 보통 사람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왜 아직도 코가 한 개에요? 라고 묻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시간의 숲' - 시간이 멈춘 고요한 숲에서 나와 만나다 [후기] 영화와 책

송일곤 감독, 박용우, 타카기 리나 주연의 '시간의 숲'을 상암CGV에서 봤다.
CGV에서 고객님의 포인트가 4월말일로 소멸한다고 해서 부랴 부랴 고른 영화.
이미 본 영화와 헐리웃 영화들 그리고 남은 영화가 바로 이 '시간의 숲'.
배경이 신비로운 숲이라서 그림을 보고 선택했다.
결과적으론 참 잘한 선택! 그림도 멋질 뿐 더러 타카기 리나의 내숭없는 솔직함에 여러번 웃기도 했다.

배우 박용우가 영화 '아이들'을 끝내고 일본으로 열흘간 떠나고 이 길에 한국어를 하는 일본 여배우 타카기 리나가 동참한다.
박용우와 리나의 나래이션.
두사람의 산책, 산행, 시간이 갈수록 마음을 터놓은 대화.
카메라가 박용우의 얘기를 듣는 타카기 리나의 큰 눈을 잡는다.
리나의 눈동자와 작은 고갯짓은 박용우의 눈물과 마음을 진심으로 함께 나누려 하였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시간은 기억을 지우고 기억은 시간을 만든다"

영화속에서 박용우가 한 말이다. 
그가 직접 생각해낸 말일까? 그 말이 영화 보는 내내 따라 다녔다.


기억이 시간을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마트를 갔다가 갑자기 떠오른 어떤 기억이 있다.

대학교 때 중국 천진을 혼자 여행하던 중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가는 중국인 남자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가 나를 조선족이 하는 불고기 집에 데려가서 밥을 사줬다. 삼십대 초중반의 건장한 남자였는데 나는 당시 중국어 왕초보라서 그가 내게 하는 말의 90%를 못알아 들었다. 밥을 산 것은 왜 그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은 말도 안통하는 내게 왜 고기까지 사서 먹였을까? 내가 밥먹는 동안 그 사람은 담배를 피워대며 식당 주인과 웃으며 얘기했던 그림이 떠오른다. 해외에 고위 정부관료나 부유층만 허가받고 나가는 당시 중국에서 외국인이란 나의 존재가 그에겐 외국을 중국으로 가져온 것 같은 흥미로운 여행이었을라나?

전혀 관계 없는 기억들이 일상에서 툭툭 튀어 나오면서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상대의 심정을 헤아려보고 그때는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뒤늦게 보이는 것. 기억이 시간을 만든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까?

'시간의 숲'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야쿠시마의 숲속에서 조용히 나를 들여다 본다.
가만히 떠오른 기억들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낸다.








Day 10. 싱글만의 버킷리스트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정확히 2주 전 일요일 아침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했다.
"그 애가 9월에 결혼을 한다는 구나. 엄마도 친구 통해서 들었다. 이제 걔한테 연락하지 말으렴"
태연한 척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손이 후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OO오빠,
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심장이 멎을 것 같고 손이 떨려서 글씨가 엉망이었다. 
나의 심정을 그대로 적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다시 만나려고 서른다섯 통의 편지를 썼다는 얘기를.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얘기를.
편지를 쓰고 보니 헤어진 이유가 명확했다는 것을. 다시 만나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의 편지들은 처음엔 슬펐다가 나중엔 그리웠가 마지막엔 이성적으로 헤어진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말을 끝없이 써내려갔다.
편지를 쓰며 마음이 나아졌다.
중간중간 잠깐씩 울었고 건강하고 어머니들끼리 사이 어색해지지 않길 바란다는 말로 편지를 맺은 뒤 봉투에 넣고 봉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랜만에 펑펑 소리내서 울었다.

집에 있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전화기 목록에서 최근에 알게 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미술관에 갈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내 사정을 한참 모르는 이성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저녁이 됐어도 집에 여전히 가기 두려워 옛 남자친구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를 붙들고 잠깐을 울었다.

그렇게 폭풍같은 한주가 흘러갔다.
결혼이 장난인가 싶어 화가 났다가도 그에게는 안정된 결혼 생활이 가장 우선이라는 걸 이해하는 쪽으로 정리했다.

지금은 그 일이 삼사년 전의 추억 같다.
사랑한 건 맞지만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더 묵고 묵어서 10년 전의 추억처럼 마음 한쪽 작은 구석에 착 가라앉으면 좋겠다.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고 혼자였던 연애off기는 가장 길었을 때가 5개월이었다.
5개월에 곱하기 2를 해도 길어야 10개월.
싱글인 이 기간동안 커플은 할 수 없고 싱글만이 누릴 수 있는 싱글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스킨스쿠버 자격증 따기.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 묶으며 올레길을 걷기.
미술관 가기.
통기타 배우기.
연애 소설 구상하기. 
조지 마이클 콘서트 가기
템플스테이 체험하기.
유럽 여행하기.

지난 주에 너무 달렸나 보다. 주말에 편두통이 왔다.
오늘부터는 조금 욕심을 버리고 약간의 여유를 갖고 하루를 채우려 한다.

나의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채워가고 있다.
옛사랑은 작게 접어 마음의 서랍에 넣어 두었다.
길어야 십개월.
다시 사랑을 하기 전까지 마음을 활짝 열고 온 촉각으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오늘레시피
커플일 때는 못하고
싱글일 때만 가능한
싱글만의 버킷리스트 만들기.



Day 9. 연애소설 쓰기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요즘 꿈이 하나 생겼다.
죽기 전에 연애소설 한 편 쓰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좋다.
단 열명이 읽고서 좋았다, 공감했다, 뭔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해줬다고 말해 주면 그걸로 족하다. 

연애, 사랑, 결혼, 애인, 연인, 남자친구, 데이트
이런 단어들은 여전히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책이건 인터넷이건 자동으로 손이 간다.

헤어짐, 이별, 실연, 전남자친구
이런 단어들은 즉각적으로 내 가슴에 와 닿아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많은 연애를 했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가슴 앓이를 한 적도 있고 상대가 나를 더 좋아해서 귀찮아 죽을 지경인 적도 있다.
같이 좋아했다가 권태로워서 차고 채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애, 연인, 사랑이란 단어만 보이면 가슴이 설레인다.
그러니 나는 이제 연애소설을 한 편 써봐야겠다. 
이 설레는 단어들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풍덩 빠져 혼자 흠뻑 젖어 봐야겠다.   
연애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이고 부족하면 숨이 가쁜 공기이다.

마지막 연애는 참 상처가 길고 오래 갔다. 
자주 다투고 헤어졌다가 질기게 다시 만나 결국은 헤어지는 걸로 끝을 냈다.
몇 년 전이면 애저녁에 뒤엎었을 연애를 경제적 환경도 비슷하고 어른들이 궁합도 좋다고 하니
기를 쓰고 노력해서 결혼 한번 해보려고 했다.
어느날은 양보했다가 어느날은 분해 했고 그러다가 또 미안해 했다.
결혼 코앞까지 갔다가 헤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헤어진 것이 정답이다. 

그리고 이제 다음 연애로 돌진하기 전에...
좀 숨을 고르고 싶다.
이효리는 허벅지를 치며 "쉴 틈이 어딨어요!"라고 힐링캠프에서 말했지만,
효리양, 이 언니는 좀 쉬어가야겠다우.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하림의 노래처럼
다른 사람이 가장 효과 빠른 치료제라는 것을 알기에 여태껏 그렇게 연애밥 먹고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조금 공백이 있더라도 과거 연애속에서 했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지막 남자친구에게 썼던 서른다섯통의 편지를 후라이팬에 볶아 태우면서 다짐했다. 

일단,
나를 자주 슬프게 하는 연애라면 멈춰서겠다.  
사주궁합을 너무 신봉하지 않겠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잊기 위해 서둘러 누구를 만나지 않겠다.
다행히 작년부터는 최악의 남자를 알아보는 눈은 생겼다.
질질 끌려다니지 않고 단호하게 나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스스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외롭다.
남들 연애하는 것도 배가 아프다.
그래도 이번엔 서두르지 말고 쉬어가야겠다.
내 과거 연애를 들여다보며, 연애소설을 한편 구상하며, 달콤한 연애를 상상하면서. 

누군가를 잊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와서 
그 사람 자체가 끌려서
연애를 시작하고 싶다.


오늘 레시피
"결혼(연애)한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면 귀찮아 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을 때 결혼을(연애를) 해야 합니다."
                                                                                                 - 법륜스님


'시' - 관객 스스로가 생각에 빠져드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후기] 영화와 책

쿡tv로 혼자 본 이창동 감독의 '시'

무얼 볼까 목록을 고르다가 기승전결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헐리웃 영화가 지겨워서 여운이 남는 영화를 보고 싶어 선택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극장에서 봤는데 지금까지도 종교, 죄, 회개, 용서에 관한 주제를 접할 때면 늘 떠오른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지게 했던 영화 '밀양'
 
그때 처음으로 좋은 영화란 재밌거나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거나, 눈물나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영화의 주제에 대해 답을 찾고 질문하게 하는 영화란 생각을 했다.

소녀처럼 순수하게 살고 싶어하는 65세의 할머니 윤정희. 아직도 마음만은 소녀이지만 가난에 치여 살고 있다. 주민센터에서 평소 쓰고 싶었던 시쓰기를 배우면서 삶을 감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하지만 끊이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삶, 가난, 가족. 그리고 동시에 진행되는 알츠하이머까지.

윤정희가 톱여배우였다지만 그녀를 잘 몰랐던 나로서는 영화 속 주인공 미자역에 딱 어울리는 아름답고 고결하게 늙어가고 싶어하는 예쁜 할머니로만 보였다. 그리고 등장하는 얼굴 모르는 조연 배우들 (몇몇 낯익은 이들도 있었지만) 때문에 영화는 끈적끈적 온몸에 베어드는 습한 7월의 여름처럼 지루하고 지겹고 흔하디 흔한 일상을 보여준다. 

소녀처럼 살고 싶었던 주인공 할머니, 지루한 일상속의 잔인함, 일상을 아름답게 살고 싶어하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바뀔 수 없는 진흙속에 빠진 수레바퀴같은 삶. 어린 시절로의 동경, 시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주인공, 그렇게 힘든 삶속에서도 남에게 느끼는 연민, 뗄 수 없는 돈과 현실... 아직도 많은 잔상들이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영화가 떠오르고 새로운 생각들이 스치는 것, 이것이 이창동 감독 영화의 힘인 것 같다.

정리가 안돼지만 계속 여운이 남는 지루했지만 좋은 영화였다. 짠~하고 즉답을 주는게 아니라 관객 스스로에게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해주는 좋은 영화이다. 
 

Day 8. 결혼한 옛 애인.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옛애인이 결혼을 했다.

오래전에 헤어졌고 3년 전에 회사앞으로 찾아온 그애를 도망치듯이 술집에 버려두고 왔었는데 작년에 페이스북으로 친구요청을 해왔다.

그를 생각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 없는 동생 같은 느낌이라 친구를 수락하고 전화통화도 한번 했고 페이스북에 글이 올라오면 간간히 댓글도 달고 '좋아요' 버튼도 눌러주는, 이제는 페북친구 중 한사람으로 남았는데 두 달 전쯤 밤 10시에 전화가 왔다. 분명히 술 취해서 전화한거다 싶어 받자마자 다그치듯 말했다.

"왜? 뭔데? 용건이 뭔데?"

"... 전화하면 안돼...?"

목소리에 힘이 없다. 너무 심했나 싶어 조금 다정하게 말투를 바꿔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고 사귀는 사람 없냐는 심심한 얘기를 하다가 시간되면 보자는 형식적인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페북을 찾아 보니 느낌이 이 애가 결혼준비를 하는 것 같다.

쪽지를 보냈다.

'내 느낌이 맞으면 너 결혼하는 것 같은데 맞니? 결혼 축하해~
(속마음 : 너, 어따 대고 결혼 전에 수작을... 정신 안 차릴래? 한번 더 밤에 전화하면 혼낸다! )

바로 답장이 왔다.

'응... 나 곧 결혼해 어제는 차마 말을 못했어.'

그리고 나서 몇번의 쪽지가 더 오가면서 결혼 준비 잘하고 행복을 빈다는 말로 맺었다.

그리고... 요즘...
그애의 페북에 신혼여행지에서 와이프와 찍은 사진들이 올라온다.
그런데...기분이..이상하다..
이 애가 이렇게 의젓했었나? 와이프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와이프랑 어떻게 만났을까? 좋은 여자일까?  
그때 헤어지지 않고 이 아이와 결혼을 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애의 생일이라고 페북에 떴다.
작년엔 아무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정도로 신경도 안썼는데 이젠 신경이 쓰인다.
이렇게 신경 쓸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축하를 해주자! 우리는 페북 친구니까~
쪽지를 보냈다.

'신혼여행 잘 다녀왔어? 내일 생일이네. Happy Birthday~'

보내고 나니 기분이 찝찝하다. 내가 이렇게 찝찝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다.
그애가 내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되는데... 다시 쪽지를 하나 더 썼다.

'내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오해는 하지 마. 근데 이렇게 내가 신경쓰이는거 보면 앞으로 연락하지 않는게 좋겠다.'

답이 없다. 불안하다. 첫번째 쪽지도, 두번째도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페북친구를 끊었으면 그만인데...
 
전화를 걸었다. 저녁 7시반. 문자는 와이프가 볼 수도 있겠다 싶어 전화로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다.
"페이스북 친구를 끊었어. (실제로 끊었다) 별 이유는 없고 서로 연락 앞으로 안하는게 옳다 싶어서.. 나를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말아줘."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전화를 안받는다... 아...젠장... 망했다.. 챙피해...

좀 걸었다. 걸으면서 계속 물었다. 
난 왜 이 아이의 결혼을 시기하는 걸까? 왜 은근히 이 애의 결혼생활이 삐걱거리길 바라는 걸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 왜 이 애랑 있었던 과거의 좋은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헤어질 때 아무 미련이 없었고 오히려 단호하게 몰아붙이고 헤어졌는데... 왜지?
답이 안나온다.

걷다가 눈에 보이는 서점에 들어갔다.
'혼자 사는 즐거움' 같은 제목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기자, 정통시사활극'을 사들고 나왔다.
버스에서 들춰보니 재미있다. 주진우 기자의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란 것도 알았다. 책 속에 머리를 박고 읽다보니 집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밤바람이 차다. 버스에서 인도로 내려 서는 순간 그 답이 명쾌하게 떠올랐다.

나는 외로웠고 그 애의 결혼에 배가 아팠다!

삶은 방심하고 있을 때 꼭 이렇게 배신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일기장에 요즘 혼자서도 즐겁게 잘 노는 내가 대견하다고 썼다.
주위사람의 결혼 안하냐는 채근만 없다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겠다고 쓰지 않았던가.
내가 일기장에까지 나를 속이고 있었다니. 외로웠으면서.. 바보...

그래, 나는 좀 외롭다! 남자가 필요하다! 아무나 말고 좋은 남자가.
나랑 대화가 통하고 취향도 비슷하고 내 눈에 멋져보이기까지 하는, 좋은 애인이 필요하다.

오늘 결혼한 옛 애인에게 쪽지를 보내고 전화기록까지 남겨버리는 모자란 짓을 해버렸다. 
버스는 떠났고 난 애당초 그 버스를 탈 생각도 없었다.
남의 사랑에 그만 배 아파하고 내 사랑을 찾아 나서야지.
어쨌든 앞으로 페북을 통해 그애의 일상을 배달받을 일은 없게 됐다.




오늘 레시피
내 자신이 싫을 땐
일단 밖으로 나가 싸돌아다니기.
그래도 싫을 땐
서점으로 피신해 재밌는 책 한권 집어들기.
책을 읽고 나서
왜 내가 미운 짓을 했는지 답이 떠오르면
그대로 인정하기.
인정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건축학개론' - 슬픈데 기쁘다. [후기] 영화와 책

'건축학개론'은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집에 돌아오는 내내 핸드폰으로 '기억의습작'을 5번 이상 듣게 하고
집에 와서도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캔맥주를 하나 따개 하더니 기어이 로그인해서 블로그에 글까지 쓰게 하는 것을 보면....

페이스북에서 지인들이 온통 - 그것도 영화는 액션과 스릴러 밖에 모를 것 같은 남자들이 - 이 영화 얘기라서 궁금했었는데 낮에  두 아이의 엄마인 베프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거 딱 우리 나이 +-3년 전후야. 전람회, 015B, 삐삐며  대학시절로 돌아가게 해. 
그 영화 보고 나서 식당에서 국밥에 막걸리 반병 시켜 혼자 마셨잖어"

여자들은 반응이 별로인 듯 했는데 나의 절친은 얼마나 좋았길래 난생 처음 식당에서 홀로, 그것도 낮술을 마셨을까.
너무나 궁금해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관에는 영화후기를 제대로 섭렵하고 오지 않은 커플들이 상당히 보였다. 이 영화는 정말 정말 현재의 연인과 보면 안된다.
남자는 당연하고 여자(인 나는 그랬다)도 과거로 돌아가 영화 내내 과거의 첫 사랑, 첫 키스만 떠 올리므로.
내 옆에 앉은 커플. 영화 보는 내내 두 손을 꼭 잡고 보든데, 끝나고도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일어서지 않더만 묻고 싶었다. 당신이 잡은 손, 지금 옆자리에 앉은 그 연인의 손이 정말 맞나요?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 속 화면은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내게 수줍은 고백을 한 황모군과 눈앞에 펼쳐진 수지와 이제훈의 추억사이를 오고 갔다. 나는 그 때 다른 오빠를 좋아하고 있어서 그 애를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달여간 사라졌다가 나타난 그애가 너를 좋아했고 그래서 힘들어서 잠깐 떠나 있었다고 했다. 그애하면 떠오르는 건  건 그애가 태워준 스쿠터 뒷자리에서 그애가 취미로 했던 무선통신HAM 교신 내용을 들으며 저녁 캠퍼스를 달린 기억 딱 한 장면이다. 그애에게 고백을 받고 놀란 것 외에 내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얼마 후 나는 호주로 어학연수를 가면서 그애와 소식이 끊겼다. 지금도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성만 기억나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남자친구의 첫 사랑 이야기가 우연히 나오면 질투가 나고 그럴 때면 '나도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지'라고 위로하며 내 질투를 달래곤 했는데 그렇게 내 필요에 의해 불러내 이용만 했던 황군이 오늘 영화를 보는 내내 떠 올랐다. 그는 아마 공무원이 돼 있겠지? 아이 아빠가 돼 있겠지? 좀 일찍 고백했다면? 아니야. 난 그때 호주 어학연수 준비에 들떠 있어서 잘 될리가 없었겠지. 

이 영화는 꼭 남자들만의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여자들도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특히 나처럼 영화배경 속 동시대에 살았던 학번이라면 더더욱 아련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예쁜 연애가 하고 싶어진다.
'첫'사랑, '첫'고백의 설레임과 소중함은 이젠 할 수 없겠지만 지금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그때와 '달라서' 처음인 사랑을 하고 싶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나도 한때 영화 속 수지와 제훈처럼 예쁘고 순수했다는 것을.
순수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슬프지만 가슴을 떨리게 하는 추억으로 깊이 남아 아름답고 소중하다.
다시 또 누군가를 순수하게, 이유 없이, 목적 없이, 계산하지 말고 예쁘게 사랑하고 싶다.


Day 7. 소개팅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소개팅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9살이 많은 남자와.

식당에서 만났는데 동안이어서 깜짝 놀랐다.
곰곰히 뜯어보면 잘 생긴 곳이 딱히 없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해서인지 전체적으로 인상이 좋았다.

소시적에는 일주일에 한번 씩 선을 봤는데 한동안 소개팅을 안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한다.

지쳐보인다. 이 사람. 연애를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말 주변이 없어서 간간히 침묵이 흘렀던 적도 있고
나도 열심히 노력했으나 영~ 코드가 맞지 않는다.

가령 영화 '아바타'를 보고 충격을 받아 그 후로 다른 영화를 못 본다고 했다.

"3D 효과가 멋지죠? "
"아뇨, 안경 안끼고 봤는데. 스토리가 정말 대단하잖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지? 자기 분신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

흠... 그런 스토리는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써로게이트'도 있고.... '아바타'는 오히려 뛰어난 영상을 밋밋한 스토리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내 생각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가했는데...

맹숭맹숭 밥 먹고 2시간이 못 돼 헤어졌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 헤어진 애인과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3시간 동안 얼마나 대화가 재밌었는지... 집에 오면서 친구에게 전화해서 또 그를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며 가슴 벅차 했는데. 
와인, 책, 영화, 여행 이야기 등 3시간이 한시간 처럼 흘렀었는데...

아직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방심했나보다. 봄이 와서 잊은 줄 알았는데.
내 한켠에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 갑자기 훅훅 튀어 나와 심장을 아프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생각지도 않을 때 내 소매를 잡아 추억으로 이끈다. 가슴이 아련하다. 아련하다. 


오늘 레시피
이별도 겸손하게.
너무 빨리 잊었다고 단정짓지 말 것.  




Day 6. 봄바람 [치료] 실연을 극복하는 방법

봄바람이 불어서 일까. 연애의 기운이 솔솔 불어온다.

실연 후 5개월이 가까워 오는 지금 그가 문득 문득 떠오르지만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아직 말끔하게 그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소개팅도 들어오고 마음에 드는 사람도 보이는 등 전과 달리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고 있다.

그의 빈자리는 좁혀져 가고 봄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있다.

 

실연 후에 누군가를 안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아직도 그에게 사로잡혀 있는 가운데 다른 이를 만나다 보니 자꾸 그와 비교하고 그의 나은 점이 더 생각나면서 그와 헤어진 것을 더욱 후회하게 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노력으로 될 인연이 아니였다는 결론이 분명해지고 있다.

 

어제 밤, 페이스북에서 채팅을 했다.

평소 페이스북에 올린 영화평과 사진을 보며 외모와 달리 섬세한 남자 같아 눈에 들어왔는데 몇 번을 마주쳐도 나한테 관심이 없는 듯 해서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고 접어뒀었다. 그런데 어제 밤 페이스북 채팅창으로 말을 걸어왔다평소보다 살갑게 대하니 그도 딱딱하지 않은 말투로 대화를 시도한다. 좋은 느낌이 왔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안 걸까? 이렇게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서로를 드러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봄바람이 분다.

묵은 때가 바람에 함께 날아가는 것 같다.

봄비도 내렸지 요 이틀.

 

위지안이라는 서른한 살에 생을 마감한 중국인 여교수가 암 말기에 1년 동안 병상에서 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책을 읽고 있다. 고통스러운 말기 암 환자가 쓴 글 임에도 밝고 잔잔하다. 위지안은 사소한 일상을 놓치지 말고 들여다 보라고 한다. 그 사소한 일상 속에 감사할 일과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서른 살에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쉴새 없이 달려온 자신이 안스럽다면서 인생에 틈을 두고 몸과 마음이 피로할 때 그 틈 속에서 쉬어가라고 말한다.

 

지난 4개월 여 동안 사랑을 보낸 후회와 아픔 속에서 많이 힘들었다. 여느 실연보다도 더 오래, 깊이 상처가 남아서 하루가 더디 갔고 의미 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토록 안 갈 것 같던 날들이 지나갔다. 언제 웃을 수 있을까 했는데 결국 웃게 됐다. 매서운 꽃샘추위 칼바람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듯이 지나가고 또 온다.  

 

삶이란 또 어떤 바람을 몰고 올까. 2012년 봄과 여름은 나에게 어떤 인연을 데려다 줄까.

비로소 기지개를 활짝 편다.

시간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오늘 레시피
날씨와 시간이 알아서 상처를 치료해준다.
흙을 밟으며 햇볕을 쬐며 걸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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